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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학교에서 문경으로 1박2일 힐링술기행을 떠났다. 문경새재 아래의 문경도자기박물관, 문경호산춘 제조장, 발효음식과 옹기를 만드는 사찰 대승사, 용궁양조장, SBK 양조장을 경유하였다. 문경도자기박물관에서는 찻사발과 막사발을 보았다. 막사발이 지금은 차를 받아들여 찻사발로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막사발의 본디 주인은 막걸리라고 고쳐 생각해본다. 다완이라고 불리는 막사발은 그 넓이와 높이를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지만, 막사발의 본디 정신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줄 하는 넉넉함과 자연스러움이다.
문경호산춘은 봄춘(春)자를 달고서 출시되고 있는 전통주다. 춘주는 당나라 때 유행했다고 한다. 한번에 담지 않고, 덧 담금하여 깊은 맛을 내는 술에 붙여지는 칭호다. 문경호산춘의 주인인 황규욱 선생님을 뵐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 어른의 열정은 어디서 나올까? 세대를 이어오는 힘, 그 힘이 당신을 또 달리게 하는 것일까? 나더러 그런 삶을 살라면 살 수 있을까?” 비가 부슬부슬 내린 덕분에 우리는 따뜻한 종택 방안에 앉아 황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 종택에는 방촌 황희 선생의 유품까지 간직하고 있다. 대대로 내려오던 호산춘은 지금 또 한 세대로 넘어가는 중이다. 황규욱 선생의 아드님이 미생물을 공부하고, 새로 양조공간도 설계하고 있다. 연전까지 어머님(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8호 기능보유자 권숙자, 2012년에 작고)과 함께 술을 지켜왔다면, 이제 아들이 합류하여 술을 돕고 있다. 종택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늘상 열어두고 있다. 우리는 호산춘을 시음하고 나서, 황규욱 선생과 함께 종택 마루에 앉거나 서거나 하면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미소처럼 호산춘의 술맛이 우리 기억속에 새겨지기를 희망하면서.
2
우리는 힐링하기 위해서, 문경 대승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하룻밤을 보냈다. 대승사는 587년 진평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하늘에서 사면석불이 떨어져 사불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고 석불 아래쪽에 대승사를 세웠다는 창건설화가 있다. 어느 절에서든 술은 금한다. 힐링 술기행단이 사찰로 들어선 것은 외람된 일이다. 하지만 대승사 철산스님은 우리를 반겨, 옹기 굽고, 차 덖고, 차 마시는 현장에 함께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철야를 종용하기까지 했다. 우리도 스님에게 청할 것이 있었다. 사찰의 곡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경옥고 한 잔 드시게들!” 그 귀하고 비싸다는 경옥고를 철산스님은 국자로 퍼억 떠서 냉면사발만한 그릇에 담아 물로 농도를 낮추어 서른명에게 내줬다. 이름하여 처음 보는 경옥고차다. 약을 차처럼 마시다니, 그러면서도 속이 달이지 않다니! 경옥고차 한잔을 마니고 나니, 눈 주변이 빠알갛게 상기되었다. 몸속의 기운들이 생동하는 듯했다. 스님은 경옥고 차 한 잔을 마시고 나면 결코 술에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여 술을 작신 먹으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열망을 가엽게 여기셨는지, 철산스님은 우리에게 금설다 두 병을 내주셨다. 대승사 구보살님은 스님이 금설다를 두 병이나 내주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곡차 금설다는 한 모금씩 넘김으로써, 우리의 힐링 술기행은 완성되었다. “스님, 불가에서 술은 금하는 것인데요.” 여쭈었더니, 스님은 “술이 아니라 약입니다”라고 말하다. “혹시 핑계가 아닌가요?”라고 묻자, 다시 말씀하신다. “약입니다.” 스님이 약을 차라고 하니 차가 되고, 술을 약이라고 하니 약이 된다. 나는 거역할 수가 없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금설다 한 잔에 들어가니, 내 몸 속으로 전나무 한 그루가 들어오는 것 같다. 잠시 환영처럼 전나무의 혼을 본다. 몸속에서 금설다의 기운이 부채살처럼 퍼진다. 금설다는 경옥고를 온몸으로 실어나르는 전령이자 엔진이었다.
3
예천은 한자로 쓰면 단술 례(醴)에 샘 천(泉)자를 쓴다. 단술이 나는 샘이 있는 마을이다. 예천읍내에 실제 술샘이 있다. 예천에서 근자에 크게 이름을 얻은 술의 공간은 삼강주막이다. 막걸리 바람이 불어, 그 혜택을 크게 본 곳이다.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삼강나루에 있던 주막인데, 조선시대 마지막 주막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면서 명소가 되었다.
삼강주막을 가기에 앞서 우리 일행은 예천군 용궁양조장을 찾아갔다. 용궁면에 있어서 용궁양조장인데, 우리는 깊은 물길 속을 지나 실제 용궁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양조장을 들어섰다. 그곳은 누추하고, 협소했지만 따뜻했다. 넉넉한 주인 내외가 내준 막걸리는 감로주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아주 신나게 요란하게 막걸리 맛에 취했다. 그 묵직한 액체의 맛, 혀를 자극하던 차가운 맛, 혀 위에서 뱅그르르 돌던 감칠맛, 그 맛은 아주 시끄러운 막걸리학교 동문들의 목소리와 함께 떠오를 것이다. 안주는 용궁답게 바닷물을 말려서 만든 왕소금이 전부였다.
양조장 정문에 2층으로 오르는 쇠 사다리가 놓여있기에, 개구쟁이처럼 2층을 올라가보았다. 2층 바닥이 드러나 있고, 1층 천정 위 부분이 보였다. 1층과 2층을 가르는 경계의 벽이 두껍다. 오래된 곰팡이들이 벽화로 남아있다. 2층이 막걸리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카페로 변하면 좋겠다. 그래서 양조장 안주인더러 양조장을 팔라고 했다. 흥정을 조용히 했어야 했는데, 너무 요란하게 했다. 그럼에도 양조장 안주인은 내 말을 받았다. 값은 말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문경도자기박물관’에서 보았던 13억원짜리 사발보다도 비싼 값이었다. 양조장내외가 양조장을 큰돈 받고 팔게 되면, 양조장 내외의 삶은 순식간에 황폐화되어 버릴 게 분명하다. 양조장 내외가 큰 돈과 양조장을 바꾸는 것은, 내 삶의 자리를 13억 사발 자리와 바꾸는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담쟁이 넝쿨이 수초처럼 감고 올라가는 붉은 벽돌집 용궁양조장이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기를 희망한다.
4
찹쌀로 만든 탄산 가득한 알코올 음료, ‘나’를 제조하는 SBK 양조장을 찾아갔다. 폐교를 아주 깨끗하게 가꾸어두고, ‘나’라는 이름의 술을 만들고 있었다. 양조장 주인 송기영씨는 술을 분신처럼 여기는 장인이었다. 술이 사람의 혼을 빼앗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이 경우일 것이다. 송대표와 초인사를 나누고, 양조장을 잠깐 돌아보았을 뿐이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송대표는 신념이 너무 강한 것 말고는 잘못이 없다. 그 술을 몰라보았던 우리가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나’는 좋은 약주를 빚는 때 쓰는 찹쌀을 주원료로 썼다. 하지만 약주도 아니오 탁주도 아니다. 누룩을 사용하지 않았다. 맥주처럼 샴페인처럼 탄산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맥주도 와인도 아니다. 맥아를 쓰지 않았고, 과실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찹쌀을 맥아처럼 가열하여 액화당화시켰지만, 약주병에 담았다. 병을 보고서는 그 술의 정체를 알기 어렵다. 맛을 보고서도 쉬이 가늠하기 어렵다. 그 술에서 어떤 맛을 기대해야 하는지, 종잡기 어렵다. 그래서 함께 시음한 우리들의 혀가 허둥대고 미각이 방황했다. 뜻을 알기 어려운 SBK 양조장 이름처럼, 쉬이 그 정체를 알아채기 어렵다. 하여튼 씩씩하고 용맹한 술이다. 지금까지 그 존재를 몰랐던 것은 우리의 게으름 탓이다. 앞으로의 기대가 더 양조장이다. 우연히 들렀지만, 자꾸 생각나는 양조장이다.
5
문경에서는 오미자술을 빼놓을 수가 없다. 어찌 알았는지 문경주조의 홍승희 대표가 문경에 들어선 우리 일행에게 전화를 했고, 술을 한 상자 들고 왔다. 연홍색 때깔 고운 오미자술에다가, 새로 빚은 고급탁주 문희까지 가져왔다. 문경의 동로면은 근 10여년 안쪽에 오미자 동네로 명성을 얻어, 오미자 체험촌, 오미자특구, 오미자술을 만들어냈다. 여성이 대표인 양조장의 술은 남성들이 빚는 술보다 훨씬 더 부드럽다. 그것이 인상 비평인지, 관능 평가의 결과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어찌됐든 문경오미자막걸리는 막걸리 바람이 뿌려놓고 간 좋은 씨앗이다.
사진설명
1> 문경호산춘의 주인 황규욱 선생으로부터 집안이야기를 듣다.
2> 문경호산춘 종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다
3> 대승사 대웅전의 모습
4> 대승사 철산스님이 내어준 경옥고차를 마시다
5> 용궁양조장에서 술을 받아가다
6> 용궁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맛보다
7> SBK 양조장에서 시음을 하면서 이야기를 듣다
8> 폐교를 활용하여 만든 SBK 양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