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잔의 상관관계

술과 잔의 상관관계

임재철 칼럼니스트

 

완연한 가을이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솜털 구름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청량하다.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을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음을 안다. 이렇듯 시간과 계절은 성실하게 가고 있지만, 지난여름 두 달가량 거의 매일 하늘이 뚫린 듯 물 폭탄이 쏟아졌다. 질기게 내리는 장맛비 덕에 햇볕을 쪼이지 못하다 보니 몸은 처지고 우울한 기분을 떨쳐 내기 힘들어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 시름과 걱정에서 애틋하게 ‘막걸리 한잔’이란 유행가도 흥얼거렸던 것이다.

온 동네 소문났던 천덕꾸러기

막내아들 장가가던 날

앓던 이가 빠졌다며 덩실 더덩실

춤을 추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들 많이 컸지요!

인물은 그래도 내가 낫지요

고사리 손으로

따라주는 막걸리 한잔

아버지 생각나네.

황소처럼 일만 하셔도

살림살이는 마냥 그 자리

우리 엄마 고생시키는

아버지 원망했어요.

아빠처럼 살긴 싫다며

가슴에 대못을 박던

못난 아들을 달래주시며

따라주던 막걸리 한잔

따라주던 막걸리 한잔(중략)

이래저래 기분이 꿀꿀해 막걸리 마신 이들이 많았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장마 기간 막걸리 판매량이 지난해 대비 20%가량 늘었다는 지적이다. 필자 역시 선후배 혹은 친구들과의 선술집 ‘막걸리 번개’로 우울함을 날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술잔에 유독 관심이 갔다. 그래서 알아낸 것 하나. 술맛을 완성하는 건 술잔이다. 주당(酒黨)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리라.

막걸리는 옹기 잔에 마셔야 맛있다. 투박한 느낌과 색감이 분위기를 띄울 뿐만 아니라 단숨에 들이켜지 않아도 시원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물론 누런 양푼 잔만을 고집하는 이도 있고, 맥주잔이나 와인 잔에 마시는 이들도 많다. 술이 약한 사람들은 소주잔에 홀짝이기도 한다. 제각각 멋이 있다.

그렇지만 술도 궁합이 맞는 잔에 마셔야 풍미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소주는 소주잔에, 맥주는 맥주잔에, 막걸리는 대폿잔에 마셔야 한다. “대포 한잔할 겨?” 참으로 친근하게 들리는 이 말은 “막걸리 마시러 가자”는 뜻이다. 그래서 ‘대폿집’은 지갑이 얇아도 부담 없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 냄새 나는 편안한 곳이다.

이와는 달리 잔의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버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속뜻이 있는 ‘계영배’라는 술잔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과욕을 하지 말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한 이잔은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하늘에 정성을 드리며 비밀리에 만들어졌던 ‘의기(儀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의기에는 밑에 분명히 구멍이 뚫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이나 술을 어느 정도 부어도 전혀 새지 않다가 70% 정도 채우게 되면 밑으로 쏟아져 버린다. 계영배를 들여다보면 잔 밑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잔 내부를 보면 가운데 둥근 기둥이 있고 그 기둥 밑에 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계영배의 비밀은 바로 그 둥근 기둥 속에 감춰져 있다. 술을 적당히 부으면 기둥 밑의 구멍으로 들어간 술이 기둥 안쪽 관의 맨 위까지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술이 아래쪽으로 새지 않는다. 하지만 술을 가득 부어 기둥 속 관의 맨 위까지 차면 구부러진 말굽 위로 넘어가게 되어 술이 아래쪽으로 빠지게 된다. 이때 잔 아래 구멍으로 연결된 관은 술이 빠지는 만큼 진공상태가 되므로 관 안쪽과 바깥의 압력 차로 인해 기둥 밑의 구멍 안으로 술이 계속 들어가 바닥이 보일 때까지 새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계영배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잔으로, 흔히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닌다.

우리가 혼인할 때 음양오행설에 입각하여 신랑 될 사람과 신부 될 사람의 사주를 보아 배우자로서 두 사람의 적격 여부를 점치는 것은 아닐지라도 술도 궁합이 맞는 잔에 마셔야 제격이라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국내산 탁주, 약주, 과실주, 증류주 등 우리 술을 감별하고 음식과 궁합이 맞는 조합을 찾아주는 전문가, 그들을 우리는 전통주소믈리에라고 부른다. 전통주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배경, 건강 정보 등을 알려 술의 가치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우리 술의 발전을 위한 조력자라 할까.

가령 붉은색 고기의 대표적인 소고기는 일반적으로 강하고 타닌이 풍부한 레드와인과 조합이 맞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한식에서는 양념을 한 소고기 요리가 많으므로 알코올 도수가 있는 문배주, 안동소주, 화요 등을 추천하는 것을 보게 되고, 돼지고기는 소주와 잘 어울리지만 향기가 짙은 오가피주나 두견주, 과하주 등과도 사이가 좋다. 숯불구이라면 소주를 곁들이고, 양념을 한 구이라면 복분자나 산머루 주를 함께 마시면 좋다고 한다.

이처럼 전통주소믈리에가 하는 일을 직접 들여다보면 계절, 장소 그리고 음식에 따라 전통주 추천을 달리하는 모습을 엿보게 된다. 봄에는 식욕을 돋을 수 있는 것, 여름에는 더위를 잊을 수 있는 상쾌한 것, 가을에는 밸런스가 좋고 안정감이 있는 것, 겨울에는 바디가 무거우며 알코올이 강하고 농도가 진한 것을 최고로 추천하는 것을 알게 된다.

가을 하늘은 유난히 파랗다. 깊어가는 가을은 노랗게 익어가는 들녘에 가면 더욱 진하다. 아마 농사짓는 이들의 수고로움이 더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결실을 수확하는 황금빛 들녘논두렁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한잔하며 활짝 웃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 같은 술과 잔의 궁합과 함께 서로 공존하는 것을 모두가 안다. 절제의 미학이 있는 ‘계영배’ 처럼 단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삶의 절제까지를 포함, 힘든 시기를 버티는 우리에게 술과 술잔의 공존정신처럼 진정한 조화가 세상의 핵심이 되기를 바래본다. 아주 간절히….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이 첨단과학으로 문화재의 숨겨진 비밀을 다루는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 특별전을 11월 15일까지 진행한다. 사진은 백자 양각 쌍학무늬 계영배 및 CT 이미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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