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술사랑과 불취무가(不醉無歸)

박정근 칼럼

정조의 술사랑과 불취무가(不醉無歸)

한국을 흔히 술을 권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흔히 사람의 인간미를 친구나 이웃 간에 서로 술을 권하는 빈도수를 척도로서 평가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 지 짐작하게 한다.

술을 잘 권하는 인물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단연코 조선의 왕 정조이다. 그래서 그가 대중들에게 제시한 가장 상징적인 문장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마라 (不醉無歸)”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이 어귀는 수원의 팔달문 시장 입구에 있는 정조의 동상에 새겨져 있다.

설혹 그 말이 백성들이 술을 즐길 수 있는 넉넉한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라고 할지라도 그의 술에 대한 애정을 단도직입적으로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남성적인 기개를 선호했던 것 같다. 그는 선비들에게 종일 궁술을 연마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그의 남성적 편향은 그로 하여금 바가지 크기의 옥필통에 가득 술을 담아 정약용 같은 선비들에게 마시도록 하사했다. 그 술은 삼중소주로서 보통 30-40도보다 세배 정도 독한 소주였다.

임금이 신하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것이지만 삼중소주는 너무 독해서 마시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정조의 하사술로 고생을 한 탓에 자식들에게 술을 가급적 마시지 말거나 술을 따른 잔을 단 번에 마시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그 증거로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정조의 하사술에 대해 쓴 편지에서 “나는 오늘 죽었다”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정조는 남성적 기개를 가지라는 의미에서 시험에 합격한 성균관 유생에게 연회를 베풀며 그들로 하여금 술을 마음껏 마시도록 했다. 그리고 내각, 정원 또는 호조에게 술을 가득 가져오게 하고 내각의 팔환은배을 이용하여 술을 유생들에게 엄격하게 돌리도록 명하였다.

정조가 유생들에게 사정없이 술을 돌리는 식으로 마시게 하고 취하지 않으면 귀가하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은 약간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강제적 음주행위라기 보다는 술에 취한 뒤 유생들의 덕을 살필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고 본다.

술에 센 나머지 잘 취하지 않는 오태증이라는 유생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정조는 술이란 마시고 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오태증은 술을 마시고도 건재하다니 그가 술을 제대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

정조는 그를 술로 쓰러뜨리려는 심술궂은 장난에 돌입했다. 그의 심술의 근거는 과거에 오태증의 조부 오도일이 희정당에서 만취하여 넘어졌다는 희극적 사건이었다. 정조는 오태증에게 술을 다섯 잔이나 더 마시게 했다. 결국 그는 조부가 쓰러진 동일한 장소에서 만취한 채 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임금인 정조가 그의 만취와 넘어지는 실수에 대해 매우 흐뭇하게 발언하였다는 것은 그의 술과 도취에 대한 자세를 이해하게 한다. 여기서 조부와 손자의 유전적 유사성을 희극적으로 바라보는 임금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를 도덕적 관점에서 비판하기 보다는 오히려 신하들의 술에 대한 사랑을 선호하는 정조의 심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조의 술에 대한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종종 대관들과 창덕궁 부용지에서 낚시를 하였다. 이 낚시 행사에는 정조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각 정파의 대표를 비롯해서 신출내기 관료들로 채제공, 심환지, 남공철, 서유구, 이가환, 이상황,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성해응 등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조선 정치가 사색당파 싸움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정조는 그들의 분열적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쓰고자 했다. 한 임금을 모시는 자들이 단지 이념적 차이로 싸우는 것을 좋게 보았을 리가 없다. 정조는 낚시를 즐기는 차원에서 물고기를 잡았던 것이 아니고 그들 간의 소통의 부재를 안타깝게 보았으리라. 그는 고기를 잡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벌칙으로 술을 강제로 마시게 함으로써 그들의 경직된 분열을 풀어헤치려는 전략을 꾸몄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정조의 술에 대한 애정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다른 사건은 진사 이정용의 만취로 인한 통행금지 범법 일화이다. 이정영은 술에 만취해서 궁궐 담장 아래에서 쓰러져 있다가 연행이 되었다. 그는 성균관에 갔다가 술에 만취되어 야금시간을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통행금지를 어겼다는 이유로 형조에 넘겨져 형벌을 받아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한양에 술집이 지나치게 많이 생겨 지나친 음주에 대해 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었던 상황이었다. 사대부들은 아예 술집을 철거하자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가 술에 대해 부정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에 형조가 궁궐 근처에서 술에 만취한 채 야간통금을 어긴 행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판단을 하려고 했으리라.

하지만 정조는 성균관 주변의 민가와 집춘영의 지붕이 맞닿아 있은 지리적 상태를 근거로 야금시간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전교를 내렸다. 오히려 정조는 관료나 유생들이 주량이 너무 적음을 탓하며 이정영의 만취가 가상하다고 칭찬하였다.

이것은 정조의 술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더 나아가서 정조는 주체미를 한 포대 주어서 술을 실컷 마시도록 장려하였다. 물론 술에 취한 중에 그의 덕을 살펴보라는 명분을 넣어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정조의 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 : 강원도 홍천에 자리잡고 있는 ‘예술’양조장 입구에도 ‘불취무귀’란 안내석이 있다. 정회철 대표가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이곳에 오면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고 겁(?)을 준다.

박정근 (대진대 교수, 윌더니스 문학 발행인, 소설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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