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베이커와 녹색의 악마

이 앨범은 그가 사망하기 2주 전에 녹음한 것으로, 유럽 투어 콘서트 중 1988년 4월 28일 독일 하노버의 푼크하우스 콘서트 실황을 2장에 담아낸 것이다. 'My Favorite Songs'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진정 쳇이 사랑한 곡들을 들어볼 수 있다. 개인적 추천곡은 ‘I fall in love to easily’.

音酒동행

쳇 베이커와 녹색의 악마

문경훈

 

세상에 정말로 천사와 악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학사에는 유명한 네 악마가 있다. 데카르트의 악마, 라플라스의 악마, 맥스웰의 악마, 다윈의 악마가 그들인데, 뼛속까지 인문학도인 나에게 맥스웰의 악마나 다윈의 악마는 생소하기만 하다.

그나마 데카르트의 악마는 학부생 시절 귀동냥으로 들었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을 떠올리며 아는 체 할 수 있겠다만, 데카르트 철학의 깊이를 생각한다면 남부끄러울 수준이다.

이렇듯 악마와는 영 연이 없으니 천사들(?)과 친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더 지독한 악마에게 홀려버리고 말았다. 수없이 많은 가난뱅이, 철학자, 예술가들에게 삶의 고통 대신 위안과 영감을 가져다주었을 그 악마는 화가 고흐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귀를 잘라버리게 만들었다는 낭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 역시 그 악마를 너무 사랑해서 귀는 아니라도 간의 일부는 기꺼이 바치고 있다. 아무래도 악마라는 이름을 사랑하기엔 좀 꺼림칙했던 것일까. 녹색의 요정으로도 불리는 그 악마의 이름은 ‘압생트(Absinthe)’다.

압생트는 증류주에 아니스(Annis), 회향(fennel), 쓴쑥(wormwood) 등을 빻아 혼합하여 2차 증류한 후, 다시 한 번 각종 허브류를 침출하여 만들어진 술이다.

브랜드에 따라 투명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때 침출시킨 허브류의 영향으로 매혹적인 초록빛을 가지고 있다. 또 기존에 초록색을 띠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황갈색으로 변해가는 것이 매력이라는대 이미지 때문인지 요즘은 인위적으로 색변을 막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는 50%~75%로 상당히 높은 편인데 덕분에 소량으로도 취할 수 있으니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은 술답게 경제적 효율성 역시 출중하다. 압생트는 세상에 나온 이후 많은 인기를 누렸다. 같은 압생트로 할지라도 가격대가 다양해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었고 벨 에포크 시기의 낭만적인 분위기도 그 인기에 단단히 한몫했다.

하지만 그 인기 때문일까. 쓴쑥에 포함돼있는 투존(Thujone)이라는 성분이 환각 및 정신착란을 불러일으켜 끔찍한 사건사고를 일으킨다는 누명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그 바람에 오늘날 압생트의 인기는 찬란했던 예전을 떠올리면 초라할 수준이다.

때문에 국내에서도 인지도는 낮은 편이고 주로 칵테일의 베이스로 쓰이지만 누가 뭐래도 매력적인 술임은 분명하다. 잔을 채우면 먼저 투명하고 연한 초록빛이 눈을 사로잡고, 입가에 잔을 가져오면 달콤하면서도 상쾌한 향이 코에 맴돈다.

다른 술에선 쉽게 맡을 수 없는 이국적인 향인데 굳이 찾아보자면, 이빨을 뽑은 다음 날 치과에 가서 소독약으로 가글을 할 때 나는 향이 압생트의 향과 매우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압생트 쪽이 달콤한 향이 좀 더 강하다. 향을 마음껏 즐긴 후 한 모금 머금으면 보통은 예상보다 더 달달한 맛이 처음 찾아오고, 이어서 상쾌함이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

그리고 도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약 도수 70%의 압생트를 마신다면, 술이 식도에서 위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아찔할 정도의 뜨끈함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높은 도수에 낯선 향을 가진 이 독주를 왜 마시나 싶겠지만, 천천히 한 잔을 비우고 또 다음 잔을 비우고, 심각한 표정으로 예술가라도 된 양 공상의 세계에 잠깐 빠졌다가 다시 셋째 잔을 들게 된다면, 누구라도 압생트의 매력에 빠질 것이다. 만약 그럼에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면, 쳇 베이커(Chet Baker)의 음악과 함께 하길 추천한다.

압생트를 마실 때면 난 늘 쳇 베이커를 생각한다. 쳇 베이커(Chet Baker)는 1950~70년대 활동한 미국 출신의 재즈 트럼페터로 한 때는 쿨 재즈의 왕자로 불렸던 인물이다. 동시대의 마일스 데이비스나 빌 에반스에 비하면 재즈사에 남긴 족적이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두터운 팬 층을 지니고 있다. ‘My funny valentine’, ‘I fall in love too easily’, ‘Time after time’ 등의 곡들은 길을 걸을 때나 라디오에서도 종종 흘러나오는 명곡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건 ‘본 투 비 블루’라는 그의 전기영화를 보고나서였다. 이름 그대로 푸른빛이 넘실댔던 그 영화는 따듯하면서도 우울했다. 그러나 실제 쳇 베이커의 삶은 그보다 더 우울했고 비참했다. 재즈 뮤지션으로서 백인이 받았던 당대 재즈계의 질시와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에 대한 열등감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대다수의 뮤지션처럼 그도 자연스레 술과 마약에 빠졌는데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평생 약물중독과 금단현상에 시달렸고, 옥살이도 피할 수 없었다. 마약에 찌든 그의 연주는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늘 주변인들, 특히 그와 가까웠던 여성들의 삶을 끔찍하게 망쳐놓았다.

결국 그 자신도 59세의 나이에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젊었을 적 그의 목소리는 세련되고 미려하지만 나는 약물에 허덕이던 노년기의 쳇 베이커를 좋아한다. 마일스의 연주가 천재의 번뜩이는 재치와 촘촘한 노트로 정교하게 구성돼있다면, 그래서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킨다면, 쳇 베이커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여백이 많다.

2016년 개봉한 에단 호크 주연의 쳇 베이커의 전기영화이다. 영화는 쳇 베이커의 삶 중 극히 일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에단 호크의 연기력은 물론 영상의 빼어난 색감과 감정선이 빛난다.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와 ‘Born to be blue’가 흘러나오는 엔딩씬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그의 연주에는 놀라운 재치와 힘 대신에 섬세면서도 어딘가 억눌린 감정이 가득 담겨있다. <The Last Great Concert>는 그가 죽기 2주 전의 공연 실황을 담은 유작 앨범인데, 앨범에 수록된 ‘My funny valentine’은 특히 필청을 권하고 싶다. 화려하진 않지만 한껏 감정을 끌어올린 트럼펫 연주 뒤에 나타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듣노라면 우울함과 동정심을 넘어 비극적인 삶의 예술가와 나를 일체화시키는 지경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러면 그가 느꼈을 괴로움과 비참함이 사납게 온몸을 할퀴고, 이내 녹색의 악마에게서 위안을 찾는 것이다.

평생을 마약과 술에 찌들어 살았던 그가 실제로 어떤 술을 즐겨 마셨는지 난 알 길이 없다. 그래도 항상 압생트를 마실 때면, 괴로웠을 그가 나처럼 이 녹색의 악마에게서 위안을 얻었을 거라 상상해본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알코올이 주는 독함은 사라지고 달콤한 위안만 남게 되는 것이다. 오늘 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당신에게 쳇 베이커와 녹색의 악마를 권해본다.

◇ 필자 문경훈

문경훈

▴1990년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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