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酒동행
그날들
문경훈
가객 김광석, 그의 노래가 왜 대단하고 여전히 사랑받는지는 이미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해왔으니까 오늘은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두서없이 해볼까 한다.
우리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하셨다. 부르는 것도, 듣는 것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유년 시절의 기행’, 김세환의 번안곡 ‘목장길 따라’, 어은경의 ‘누구를 기다리나’, 송창식의 ‘고래사냥’ 등은 아버지가 항상 흥얼거리시던 노래들이었기에 나는 지금도 가사를 줄줄 외고 있다.
어쩌다 친척들과 함께 1박 2일로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우리 아버지는 항상 기타와 두꺼운 포크송 모음집을 챙기셨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짐을 풀면 우리들은 신이 나서 밖으로 뛰쳐나갔고 어른들은 여독을 풀고는 이내 가져온 음식과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 어른들의 얼굴은 이미 불콰해져 있었고, 그렇게 연거푸 들어가는 술에 흥이 한껏 오르신 아버지는 가지고 온 포크송 모음집을 펴놓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주시곤 했다.
워낙 두꺼운 책이었기에 그때그때 레퍼토리는 달랐지만 작은 공연의 마무리는 항상 김광석의 ‘일어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난 무슨 노랜지도 모르고 후렴구의 ‘일어나, 일어나’를 열심히 따라 불렀다.
아버지의 목소리로 먼저 들어서일까. 최신곡보다 한세월 흘러간 노래들이 좋았다. 아버지의 포크송 모음집은 그대로 내 음악 교과서가 되었다. 중학교 2학년 기술·가정 시간, 장기자랑으로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불렀다. 호응은 없었고 노친네라는 별명 하나만 더 붙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듣기엔 좋으셨는지 교무실로 데려가셔서 빼빼로 하나를 손에 쥐어 주셨다. 어느 날 밤, 자러 간 침실에서 ‘쟤가 듣는 노래가 저래서….’ 따돌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시던 어머님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의 우려와 달리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지금은 뉴질랜드로 이민 간 고등학교 동창 녀석은 밴드 퀸과 넬의 열렬한 팬이었다. 학교에서 프레디 머큐리를 따라 한다고 웃옷을 벗고 ‘bohemian rhapsody’를 열창하던 녀석이었다. 그 친구와 난 노래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지게 되었고 야자 시간이면 서로 mp3를 바꿔서 듣곤 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김광석의 팬이, 난 퀸과 넬의 팬이 되었다. 대학생 때에는 아버지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도 항상 싸구려 기타를 등에 지고 다녔다. 들으라는 수업은 안 듣고 허구한 날 학교 앞 벤치에서, 학회실에서 술 마시면서 노래를 불렀다.
늘 꿈꿔오던 낭만적인 대학 생활이었지만, 문제는 내가 대학생일 때는 낭만의 80년대가 훨씬 지난 2009년이었다는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 때 내 동기들 대부분은 날 별종 취급했던 것 같다.
한 친구만 빼고. 그 친구도 김광석을 좋아했고 다른 모든 흘러간 아름다운 노래들을 좋아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내 옆에서 같이 술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술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던 녀석이었다. 늦잠에서 일어난 아침,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던 녀석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김광석을 듣지 않았다. 통기타 대신 일렉기타를 걸쳐 맸다. 가방 속에는 아버지의 포크송 모음집 대신 타브(tab) 악보가 차곡차곡 채워져 가고 있었다. 거세 불안에 허우적대던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독립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 김광석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졌다. 성장한다는 건 그런 것일까.
한번은 오랜 친구와 동네 LP바에 갔다. 술은 전혀 못 마시는 녀석이 다행히 노래는 좋아했다. 어느 락스타의 기타 솔로가 절정을 찍고 있을 무렵 친구가 김광석의 노래를 신청했다. 순간, 뻔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익숙한 음색에 낯익은 가사가 흘러나왔다. 그 날 내가 신청한 어떤 노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칵테일 한 잔을 앞에 두고 김광석의 목소리에 흠뻑 빠져있던 친구의 모습은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 날 녀석이 신청한 노래가 제일 좋았다.
또 어떤 날은 우리 반 아이들과 놀러갔다 밤길을 달려 돌아오는 차 안이었다. 요란한 힙합과 락을 듣다가 문득 ‘선생님 이 노래 아시죠?’라며 제자가 물었다. 그리고 김광석의 노래를 틀었다. 분명 아는 노래였는데 한참을 따라 부르기 전까진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나온 시간에 가슴이 서글펐고, 이상하게도 어린 나를 차에 태우고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내가 더 이상 찾아 듣지 않던 포크송은 결국 아버지의 음악이었다. 김광석의 목소리에는 기운 넘치고 강하던 젊은 날의 아버지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손을 잡던 어린 날의 내가 살고 있었다. 내가 김광석의 노래를 듣지 않았던 날들, 내가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독립한 날들은, 아버지가 늙어가던 날들이었다. 기타를 치고 ‘일어나’를 부르던 아버지도, 열심히 후렴구를 따라 부르던 어린 나도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가버린 날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며칠 전 한 TV프로에서 최신 과학기술을 이용해 김광석의 목소리를 복원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방송에선 김광석의 목소리로 생전 불렀을 리 없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광석이 살아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했다. 돌아온 김광석의 목소리처럼 아버지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젊고 강하던 날의 아버지가 보고 싶다.
◇ 필자 문경훈
▴1990년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