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의 여정

베이비부머의 여정

임재철 칼럼니스트

 

지금까지 이룬 게 없으면 이후에도 이룰 게 없을 것이요,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면 이제 그만해도 돼! ‘연로한’ 은퇴자들 사이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다. 주변에는 정년을 맞이하면서 ‘안하던’ 공부를 해서 대작을 내겠노라 수선을 피우는 이들이 적지 않고, 그 좋아하던 술잔보다는 공부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책 속에서 몸을 빼지 못하는 ‘천생 서생’도 더러 있다. 이 두 부류 다 사실은 좀 더 잘 ‘늙는 삶’을 꿈꾸는 자신들을 향한 것이라 하겠다.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후라고 해서 이전과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새 삶을 향한 태도나 다짐, 더 나가면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용기가 필요하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772~846)은 자신을 향한 「자경시(自警詩)」에서 이렇게 말한다.

蚕老繭成不庇身(전노견성불비신)

蜂飢蜜熟屬他人(봉기밀숙속타인)

須知年老憂家者(수지년로우가자)

恐似二虫虛苦辛(공사이충허고신)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벌은 굶주리며 만든 꿀 다른 이가 차지하네

알아 두세, 늙어서도 집안 걱정하는 자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이 시는 내가 아니면 그 학문이 폐기될 것처럼 여기는 자, 내가 아니면 강의실이 폐쇄될 것처럼 구는 자, 세상의 ‘임무’를 놓지 못해 동분서주하는 자칭 석학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노년은 외부로 향해 있던 관심과 시선을 줄이고 나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연습이 필요한 시기라고 한다.

우리는 코로나19 펜데믹이 지구촌 전체를 덮친 후 모든 사람이 불안한 상황에서 한 해를 보냈고 지금도 그렇게 2년째 해를 걸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와 지구촌 전체가 서로 공감하는 마음으로 상생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든 사회 영역이 여의치 않아 보인다.

특히 무제한적 인터넷 소통의 방식이 집단 이기주의 온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 노년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어떤 노년을 살 것인가의 문제가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지만 극한적인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진정한 의미의 보수 진보의 이념이나 철학, 가치관은 실종되었고 그보다는 정치적 개인적 이익을 중심으로 한 집단 이기주의 도구로 변질되고 악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가 하면 세계적인 디지털 생태계의 확장은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주목할 현상이다. 애플리케이션(앱)은 우리 삶에 핵심적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MZ세대는 우리 공동체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즉, MZ세대가 베이비부머세대(1955~1964년생)·X세대(1965~1979년생)에 이어 주력세대로 떠올랐다. MZ세대는 전체 인구의 30% 이상, 기업 구성원의 60%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들은 주력세대로 떠오르면서 추구하는 커리어나 라이프스타일도 달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MZ 고객군 내에서 부를 축적하고 보유하는 사람 수는 지난 10년간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사실상 한국에서의 디지털 변환을 주도해 왔지만 그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하며, 소득 분배가 아직 더 나이 든 세대에 치우쳐 있어 부의 분배에 있어서는 소외돼 있다는 것이다.

반면 베이비부머(BB:baby boomer) 세대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부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디지털 공간에서 최우선 고객 그룹은 아니지만, 전체 인구 중 25%를 차지하며 지출에 있어 거대한 규모를 담당하고 있다. 2차 베이비부머 세대인 1970년대 생까지 포함하면 전체 인구 대비 비중은 35%까지 늘어난다. 고령화 추세를 감안할 때 앞으로 10년 후에는 한국인 다섯 명 중 두 명이 이 범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이 든 베이비부머 세대는 절대수도 클뿐더러 소비능력을 반영하면 그 크기가 MZ세대의 4배에 달한다. 문제는 이들이 퇴직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계층은 디지털 전환 프로그램에서 무시되고 있다. 최근 트로트 열풍이 좋은 예다. 오랫동안 음악 산업은 젊은 세대에 집중해 왔다. 트로트 열풍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정확한 상품과 서비스를 디자인하고 전달할 수 있다면 시장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는 온라인 쇼핑 활황을 가져왔지만, 실상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쇼핑을 하게 됨으로써 활황이 가속화되었다는 분석이다. MZ세대의 붐비는 디지털 공간과 비교하면 베이비부머 세대는 다수의 개발자와 사업자들에게블루오션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앱과 온라인 상품들은 MZ세대에 치우쳐 있다. 장년 시장은 더 많지는 않더라도 제대로 동기부여와 보상이 이뤄진다면 베이비부머 세대가 차세대 디지털 신대륙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높은 교육 수준과 양호한 건강 상태, 풍족한 삶의 질을 고려할 때 앞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사업자들이 이들 세대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됐다고 봐야 하는 이유다.

일본은 베이비부머들을 ‘단카이(團塊) 세대’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1949년 사이에 태어난 부류들이다. 6·25 전쟁 이후 태어난 우리의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4년)보다 7~8년 정도 빠르다. 단카이라는 말은 큰 덩어리라는 뜻이지만 ‘불쑥 튀어 나왔다’는 의미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전후 서구의 개방적인 문화를 수용하면서 한때 일본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던 주역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경쟁심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면서, 조직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경제적 동물’이라고 불릴 만큼 재테크에도 밝았고, 1970~1980년대 일본 고도경제성장의 영광과 1990년대 이후에는 그 후유증을 동시에 경험한 세대로 통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이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이들도 노인 취급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노인층의 범죄가 증가하면서 후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등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다. 이런 일본의 세대갈등에 최근 반전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정부에서도 단카이 세대를 비롯한 고령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들에 대한 경제적 가치 부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은퇴 세력들의 희생 위에 일본 경제가 이 정도의 글로벌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들의 경험·노하우를 어떻게 현 주축 세대와 효율적으로 접목시킬 것인가로 초점을 모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상황 역시 100세 시대가 현실화되면서 일본의 변화를 보듯 우리에게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하겠다. 게다가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적 갈등은 일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우리 경제의 주춧돌인 3040세대는 60대 이상 은퇴 세력에 대해 무시의 수준을 넘어서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려는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다. 경제성장을 한답시고 그들만 호시절을 다 누린 뒤 본인들에게 남긴 것은 빈손과 지푸라기뿐이라고 원망을 한다. 반면 은퇴 세력들은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우리 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았다며 젊은이들을 향해 헝그리 정신이 결여돼 있다고 비아냥거린다. 갈수록 대립과 분열은 증폭되고 급기야는 촛불과 태극기로 나뉘는 기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가령 인생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보다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이런 말조차 나누기가 쉽지 않다. 이 문제를 묻기가 상황적으로 쉽지 않은 탓이다. 불경기에 코로나 역병으로 청년들은 사회진입부터 브레이크가 걸렸다. 수많은 청년들이 좌절하고 있다. 취업은 사회생활의 첫 단추이다. 이것은 생애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가장 의욕이 넘쳐야 할 청년기에 위축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베이비부머의 사정은 비슷하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건전한 발전과 경제적 가치 창출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베이비부머의 척박한 통과의례를 거친 필자를 비롯, 베이비붐세대는 불확실한 미래와 준비하지 못한 노후문제로 안절부절못한다. 따라서 베이비부머 세대들을 뒷방 늙은이로만 취급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재능이나 축적된 부를 사장시키는 것이 사회·경제적으로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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