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술병』
추석 한가위 휘영청 밝은 달이
육정균 (전국개인택시공제조합이사장/시인/부동산학박사)
9월초 가을은 문턱에 와 있고, 비는 온종일 퍼붓는다. 가을 곡식들이 여무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빗속에서 한가위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추석(秋夕) 명절의 의미를 그려 본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가배·가위·한가위·중추절(仲秋節) 등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명절이다. 추석 무렵은 농경민족인 우리 조상들에 있어 봄에서 여름 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이 익어 수확할 계절로, 1년 중 가장 큰 만월을 맞아 즐겁고 마음이 풍족하였다.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아서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까지 생긴 좋은 계절의 명절이다.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 도읍 안의 부녀자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가 각기 거느리고 7월 15일부터 8월 한가위 날까지 한 달 동안 두레삼 삼기를 하였고, 마지막 날 심사를 해서 진편이 이긴 편에게 한턱을 내고 회소곡(會蘇曲)을 부르며 놀았다고 한다.
오랜 전통이 있는 추석에는 여러 가지 행사와 놀이가 세시풍속으로 전승되고 있다. 추석이 되면 조석으로 기후가 쌀쌀하여지므로 사람들은 여름옷에서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다. 설 때 새 한복 등‘설빔’을 곱게 해 입는 것처럼 추석엔 머슴을 둔 농가에서는 머슴들까지‘추석빔’을 해서 입혔다.

추석날 아침 일찍 일어나 첫 번째 하는 일은 차례를 지내는 일이다. 며느리가 수일 전부터 미리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낸다. 추석 때는 설날과는 달리 흰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고 햅쌀로 술을 빚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가을 수확을 하면 햇곡식을 조상에게 먼저 천신(薦新)한 다음에 사람이 먹는데 추석 차례가 천신을 겸하게 된다. 차례가 끝나면 차례에 올렸던 음식으로 온 가족이 음복(飮福)을 한다.
아침 차례를 지낸 후 식사를 마치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는 데, 추석에 앞서 낫을 갈아 산소에 가서 풀을 깎는 벌초를 한다. 요즘 현대인의 추석은 공휴일로 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귀향을 하기도 하지만, 직장인마다 일터를 벗어나 여러 날을 쉬게 됨에 즐거워한다.
추석 무렵은 좋은 계절이고 풍요를 자랑하는 때이기에 마음이 유쾌하고 한가해서 여러 놀이를 즐겼다. 사람들이 모여 농악을 치고 노래와 춤이 어울리게 된다. 농군들이 모여 그해에 마을에서 농사를 잘 지은 집이나 부잣집을 찾아가면 술과 음식으로 일행을 대접한다. 먹을 것이 풍족하니 인심도 좋아서 반갑게 대접을 하였다. 이렇게 서너 집을 다니고 나면 하루가 갔다. 농군들이 마을을 돌면서 놀 때 ‘소놀이·거북놀이’를 하였다.
소놀이는 두 사람이 멍석을 쓰고 앞사람은 방망이를 두 개 들어 뿔로 삼고, 뒷사람은 새끼줄을 늘어뜨려 꼬리를 삼아 농악대를 앞세우고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일행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많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마당에서 술상을 벌이고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한때를 즐긴다. 한 집에서 잘 먹고 난 다음 다른 집을 찾아간다. 풍물놀이를 하며 얻은 음식은 가난해서 추석 음식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과 나누어 먹는 협동과 공생(共生)의 전통도 있었다.
소놀이와 거북놀이는 충청도·경기도 등에서 전승되고 있다. 또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도 하였다.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씨름판을 벌이고, 궁사(弓士)들은 활쏘기도 하였다. 전라남도 서남 해안지방에서는 부녀자들이 강강술래놀이를 즐긴다. 농촌의 소년들 사이에는 콩서리를 하는 일도 있었다. 콩을 통째로 꺾어다 불을 피운 속에 넣어두었다가 익으면 꺼내어 먹는데 맛이 별미여서 아직도 추억이 새롭다. 초가을 밭 콩보다는 논두렁콩이 더 맛이 있었다.

추석에는 시절(時節)에 맞는 여러 음식이 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 준비하는 음식은 설날과 별 차이는 없지만, 추수의 계절이라 햇곡식으로 밥·떡·술을 만든다. 철이 이르면 추석 차례에 햇곡식을 쓸 수가 있고, 철이 늦으면 덜 익은 벼를 베어서 찧은 다음 말렸다가 방아를 찧어서 햅쌀을 만들어 쓴다. 철이 늦은 해에는 미리 밭벼(山稻)를 심었다가 제미(祭米)로 쓰는 일도 있었다. 어떻든 추석 차례에 대비해서 농사를 짓는다.
햅쌀로 밥을 지으면 맛이 새롭고 기름기가 있으며 떡도 맛이 있다. 추석 떡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올벼로 만든 송편이라 해서 ‘올벼송편’이라는 말이 생겼다. 송편 속에도 콩·팥·밤·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곡식으로 만들어 더욱 맛이 있다. 열 나흗날 저녁 밝은 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들며 웃고 떠든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예쁜 배우자를 만나게 되고,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총각들은 예쁘게 만들려고 솜씨를 보인다.
차례를 지내려면 술이 꼭 있어야 하는데,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여 햅쌀로 빚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 불렀다. 술을 많이 준비하여야만 이웃 사이에 서로 청하여 나누어 마시고, 소놀이패·거북놀이패들이 찾아왔을 때 일행을 후하게 대접할 수가 있다. 우리네 잔치에는 첫째가 술인 만큼 술을 넉넉히 마련하였다. 술만 풍족하면 되었다. 우리의 전통 민속주도 그렇게 발전하고 우리 민족이 음미하고 즐긴 것이다.
추석은 농경생활에서 추수감사와 조상에 보은하며 먹을 것의 넉넉함에 온갖 놀이를 즐기는 명절로 전승되었으나,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그 절실함이 많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추석 귀성은 여전하며, 풍요에 감사하고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하고, 성묘를 가는 추석의 전통은 여전하다. 올 추석 음복 자리에선 걱정 없는 술 한 잔의 대화, 자유가 그립다.
* 육정균 : 충남 당진 出生, 2000년 작가넷 공모시 당선, 2002년 현대시문학 신인상(詩), 2004년 개인시집 「아름다운 귀향」 출간, 2005년 현대인 신인상(小說), 부동산학박사, (전) 국토교통부(39년 근무) 대전지방국토관리청 관리국장(부이사관). 현 개인택시공제조합이사장, 단국대학교 부동산건설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