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막힌 통로를 뚫는 데는 술이 묘약이다
딸 가진 부모 입장서는 좋은 신랑감 찾아 백년가약(百年佳約) 맺어주길 바란다. 요즘에야 대부분 연애 과정을 거치니까 상대방 품성을 어느 정도 알고 결혼하겠지만 과거에는 초례청에서 상대방 얼굴 보는 것이 경우가 허다했다.
옛 어른들은 그래도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는 얼마나 되겠는가. 신식 문명이 들어와 결혼 전 양가부모에게 인사를 하며 지내도 막상 사위의 성격은 파악하기 힘든 노릇이 아닌가.
이런 때 요긴하게 사용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사윗감이 될 청년을 초대하여 술을 먹여 보는 것이었다.
예비 사윗감이 술을 사양하면 남자는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어느 정도 술은 할 줄 알아야한다고 강권한다.
술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한 잔을 마시면 두 잔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고, 세잔부터는 손이 먼저 나간다. 술이 갖는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쯤 되면 AI도 찾아내지 못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볼 수 있다. 술이란 건 평소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알려주는 명약이기 때문이다.
남녀 간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데 술이 명약으로 치부된다면 국가 간에서는 어떨까.
현재 미·중간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지만 50년 전에는 중국은 죽의 장막이었다. 그런데 이 죽의 장막이 술 한 잔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1972년 2월 냉전체제의 한 축을 무너뜨리는 역사적 현장에 마오타이가 등장한다. 아시아·태평양 평화 구상 등을 담은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식당에서는 중국 전통주 마오타이가 들어갔다고 한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건배를 제의하자 닉슨은 건배 땐 입만 대라는 비서진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원샷을 했다. 이 건배주 한잔으로 죽의 장막이 걷히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술의 힘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지난 3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만찬 회동이 알려지자 만찬에 오를 술이 어떤 것일까? 신·구 대통령 모두 술을 좋아하니까 취중진담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었다.
만찬 회동이 있기 전 유영민 비서실장은 당선인 장제원 비서실장에게 “이제 오이소” “얼른 보입시더” “이제 별문제 없다 아이가”라고 부산 사투리로 말을 건네며, “기왕 늦어진 건데 짧은 오찬 말고 서너 시간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약주도 걸칠 수 있는 만찬 형태로 회동하자. 배석도 양측 1명씩 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정치권에선 “두 사람이 술을 곁들인 대화를 하면 훨씬 속 깊은 대화가 오갈 것”이라고 전망도 했었다.
만찬 결과 반주는 레드 와인이었다고 했다. 전통주 업계에서는 와인보다는 우리 술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그동안 청와대 만찬주로는 이화백주, 백련 생막걸리, 대강소백산 막걸리 같은 프리미엄급 막걸리와 천비향, 풍정사계 춘 같은 약주를 주로 사용했으며 특이하게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만찬주로 북측 대표단을 위해 한라산 소주가 등장하기도 했다.
금주국가가 아니고는 정상간 만찬에는 술이 빠지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외국 국가원수가 내방했을 때 만찬주로 선정되면 그 광고 효과가 만만치 않아 해당업체는 하루아침 유명세를 타게 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국가 원수들의 방한도 많아지고 정·재계간 회동도 많을 것이다. 또한 여·야 영수회담도 열릴 것이다. 이런 때 가급적이면 우리의 전통주를 사용한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특히 여야 간 만나는 여수회담이 열린다면 심하게 취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마시며 흉금을 털어 놓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된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미·중간 회담에서도 술이 좋은 결과를 도출했듯이 우리나라 정치사에서도 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우리는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끼리도 술 한 잔 걸치면 바로 형님 아우가 되는 세상이다. 술의 순기능적 역할이다. 정치를 술로 할 수는 없어도 막힌 통로를 뚫는데 술만 한 것도 없다.
<삶과술 발행인 ti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