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냐 술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박 정근(문학박사, 소설가, 극작가, 윌더니스문학 발행인)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습성은 항상 필자를 고민하게 한다. 또한 만취할 때마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다. 혹자는 술을 마시면 마주하는 불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왜 술을 마시냐고 반문할 것이다. 아마도 필자는 학자와 문인으로서 글쓰기에 정진하는 자세 못지않게 파격적인 글을 쓰기 위해 술을 마시며 일탈을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사실 술을 좋아하는 기질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성향이기도 하다. 문제는 일단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만족하는 두주불사형의 욕망이 분출한다는 점이다. 성격이 부드러워 단도직입적으로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에도 술을 찾는다. 물론 술에 취해서 호기를 부리는 것이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속에 담아두고 끙끙거리는 것은 더욱 괴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술을 마시는 진정한 이유는 세상이 문제투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희망사항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걸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부조리 그자체가 아닐 수 없다. 이루고 싶은 이상은 신기루처럼 보일 듯 말 듯 멀리서 손짓한다. 가까이 가서 손으로 잡으려는 순간 이상은 다시 멀리 달아나서 손짓한다. 달아난 이상은 필자를 안타깝게 만들며 술로 마음의 간극을 채우게 할뿐이다.
도연명은 시인이며 동시에 유학자이다. 유학자는 책을 가까이 하고 고전을 읽는데 정진해야 한다. 그런데 학문은 새로움보다 기존 학자들의 뛰어난 글을 읽으며 정신을 수련하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기질은 익숙한 것보다 독창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시인인 도연명은 고전을 읽는데 지루함을 느꼈으리라. 자연스럽게 그는 불편한 마음을 술로 달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유학자로서 도연명의 마음은 자신의 나태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유학자와 시인의 이상은 서로 조화와 반목을 거듭하면서 술에 취해 자신의 안락에 빠져있는 도연명을 나무라며 다시 손짓을 하는 것이다.
도연명은 <무궁화 榮木>에서 시인적 지질과 학자적 기질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유학자적 이상을 추구하지만 일탈을 일삼는 시인적 기질에서 술을 찾는 자신을 자탄하는 모습은 매우 인간적이다. 도연명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탓에 인간의 보편적 딜레마를 토로하는 것이다.
嗟予小子(치여소자):아아, 이 하찮은 자는
稟玆固陋(품자고루):고루한 성격을 지녔고나.
徂年旣流(조년기류):세월은 이미 흘러가지만
業不增舊(업불중구):학업은 구태를 면치 못하네.
志彼不舍(지피불사):학문에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는데
安此日富(안차일부):날마다 안이하게 술에 취해있구나.
我之懷矣(아지회의): 스스로 이걸 생각하면
怛焉內疚(달언내구): 애석하고 괴로울 뿐이네.
필자 또한 도연명 시인의 고민을 항상 품고 살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은 적이 별로 없다. 필자는 술에 빠져 학문에 등한히 하던 시간으로 인해 자책하곤 한다. 하지만 학문의 고고한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고 지루함에 하품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도연명은 유학자적 이상에 대한 집착을 자신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그에 대한 교육열로 연계시킨다. 하지만 자식이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먹는 것만 밝히는 것이 한심하다. 시인은 자신의 이상주의적 가치를 이어갈 후손을 기대하고 싶다.
그러나 자식의 현실은 그의 기대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 이른다. 자식이 그의 삶의 자국이자 역사가 되어 영원성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자식들을 꾸짖으며 (責子)>라는 시로 재현된다.
通子垂九齡(통자수구령):자식이 아홉 살이 되었지만
但覓梨與栗(단먹이여율): 배와 밤만 탐하고 있구나.
天運苟如此(천운구여차): 하늘의 운수가 겨우 이러하니
且進杯中物(차진배중물):그저 술이나 마시며 달랠 수밖에.
시선인 도연명이 유학의 이상을 추구하고 세상의 시름을 술로 달래며 시로 노래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이 시는 그 또한 범인의 운명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삶의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보인다. 이상과 현실의 괘리에서 오는 부조리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유학자적 이상과 음주를 통한 도취적 낭만을 추구했던 도연명에게 전적으로 공감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가며 연구나 집필에 몰두하고 싶지만 체력이 점점 저하되면서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프다.
자식이나 제자들의 모습을 봐도 필자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체감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대가 구축한 것에 매몰되어 있다. 그들은 고전이나 전통은 그저 꼰대들이나 하는 고루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꼰대들의 충고는 그들에게 전혀 약효가 없다고 외친다. 이런 상황에서 요즘의 꼰대들이 젊은 세대들이 구축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극심한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 세상의 꼰대들이여, 젊은 세대들을 나무라지 말고 차라리 멋지게 술이나 한 잔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