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술 그리고 잡담
술 이야기에 취한 두꺼비
◇ 술꾼과 호랑이
범은 술 취한 사람은 잡아먹지 않고 꼭 술을 깨게 해서 놀라게 하고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옛날 옛적에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길에서 잠이 들었다. 축축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호랑이가 잠을 깨라고 꼬리에 물을 축여 얼굴에 뿌리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옆에 있는 담뱃대를 살며시 잡고 있다가, 술이 캤나 보느라 범이 코를 자기의 얼굴에 대고 냄새를 맡을 때, 호랑이의 코를 콱 찔렀다. 놀라 펄쩍 뛴 호랑이는 담뱃대로 코를 찔려 먹을 수가 없게 되자 그만 굶어 죽었다.
그 후 그 사람은 나무하러 갔다가 죽은 호랑이를 발견하여 가죽을 벗겨 팔아 부자가 되었다한다.
◇ 홍똥
징 치는 영감이 술에 취해 길에서 잠이 들었다. 한참 자다 깨어 보니 집채만 한 호랑이가 꼬리에 물을 축여 와서 얼굴에 뿌리고 있었다. 영감이 징을 냅다 치자 크게 놀란 호랑이는 얼굴에다 홍똥을 싸놓고 달아났다. 뜨거운 홍똥을 뒤집어 쓴 징 쟁이는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되었다. 이로써 대머리가 있게 되었다는 호랑이 담배 먹던 때의 이야기이다.
◇ 호랑이 꽁무니에 나팔을
한 떠꺼머리총각이 헌 나팔 하나를 사서 심심하면 불고 다녔다. 어느 날 산 너머에 갔다가 술에 취해 고개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여 눈을 떠 보니 호랑이가 꼬리에 물을 축여 얼굴에 뿌리고 있었다. 정신이 든 그는 또 다시 호랑이가 물을 뿌리려고 할 때 꽁무니에 나팔을 힘껏 끼웠다. 그러자 호랑이가 펄쩍펄쩍 뛸 때마다, ‘빵빵’하고 소리가 나자, 더 놀란 호랑이는 마구 뛰어 달아났다.
◇ 주천석(酒泉石)
양예수라는 훌륭한 의원이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노숙하다가 호랑이에게 업혀가, 호랑이 새끼의 다리가 부러져 있는 것을 고쳐주게 되었다. 호랑이가 고마움의 표시로 조그마한 돌 하나를 주었다. 양예수는 다시 호랑이 등에 업혀와 여행을 계속하였다. 한 읍내를 지나면서 그 돌이 궁금해 무엇인가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 것은 물에 담그면 물이 향기 좋은 술로 변하는 주천석(主泉石)이라는 고귀한 돌이었다. 그 돌을 담가 만든 술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백문선
이조 중엽에 백문선이란 호방한 사람이 있었다. 집안이 조석반을 제대로 못 끓일 만큼 가난했으나, 백문선은 돈 벌 생각은 안하고 건달들과 어울려서 술추렴만 하고 돌아다녔다.
백문선에게는 무남독녀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덧 나이가 차서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워낙 가난한데다가 술망나니 집안이라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으나 다행이도 인물이 뛰어나게 고왔으므로 부자 집에서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혼인 전날까지 술만 퍼먹고 나돌아 다니다가 그래도 잊지 않고 집에 돌아온 백문선에게 아내는, “내일 후행에 달리 갈 사람이 없으니 당신이 가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백문선도 과연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입고 갈 옷이었다.
“가기는 내가 가야 될 모양인데 입고 갈 옷이 만만치 않구료, 누덕누덕 기운 저고리는 두루마기 속에 입으니 보이지 않으니까 무관하지만, 요렇게 때가 쪼르르 흐르는 바짓가랑이가 두루마기 아래로 내다보이는 건 어쩌겠소?”
아내의 입에서는 한숨만 나왔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제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어떻게?” “내고쟁이를 입으시고 대님만 매면 불편하기는 하지만 괜찮을 게 아니요.” 그래서 백문선은 아내의 고쟁이를 입고 대님을 맸다. 그리고서 딸의 가마를 따라 나섰는데 팽팽히 잡아당기는 고쟁이가 뜯어질세라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사돈의 집에 이르렀다.
대례가 끝나고 폐백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잘 차린 술상이 나왔다.
사돈이 술을 권하는 바람에 백문선은 아내가 신신당부한 말을 잊고 마냥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취할 대로 취하여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누가 이부자리를 깔아 주었는지 아내의 속옷을 보고 새 사돈이 웃었는지 어쨌는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백문선은 잠결에 거추장스럽 고쟁이를 벗어 내던졌다. 아랫도리가 알몸뚱이가 되었으니 시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좀 시원해지니까 잠이 다시 깊이 들었다.
얼마쯤 지나 어렴풋이 잠이 깨자 백문선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는 더듬더듬 방문을 찾아 열고 엉금엉금 기어 부엌으로 나갔다. 아랫도리가 선뜩했지만 술이 안 깬 백문선은 자신이 바지를 벗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물독을 더듬어 물을 마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잘못하여 안사돈이 자는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방에는 잔치에 참석했던 일가친척과 동네 아낙네들이 자고 있었다. 백문선은 엎어지듯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눕자마자 천정이 들썩거릴 정도로 코를 골았다.
이튿날 한 여인이 일어나 아랫목을 보고는, “에그, 망측해라. 저게 누구야”하고 소리를 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문선은 잠결에 남이 덮고 있는 홑이불을 끌어다가 상반신을 얼굴까지 덮고는, 벌거벗은 궁둥이를 내놓은 채 엎드려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인의 비명에 다른 여자들도 일어났다. “뭘 그러우.” “저걸 봐요. 누가 저러고 자우 글쎄.” 사람들이 아랫목을 바라보았다. “저런, 망측스러워라.” “누구야?” 아낙네들을 킥킥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오쟁 할머니가 아냐.” “글쎄.” “초저녁에 있던 오쟁 할머닌가 보우.” 한 마디씩 주고받는데 백문선이 이불 속에서 잠이 깼다. ‘아뿔싸!’ 백문선은 자기가 딸의 후행으로 새사돈 집에 와서 술에 잔뜩 취했던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기가 어떻게 해서 안사돈 방에 와 누웠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결에 더워서 그런 게지. 깨면 부끄러워할 테니 가만히 이불로 덮어드리고 우리는 살며시 나갑시다.” 안사돈의 도량 있는 말에 아낙네들은 백문선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 깨물어 먹어
어느 주막에서 손님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거지가 달려들어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나리” 하고 졸라댔다. 그래도 손님이 모른 체하고 술만 마시자, 여전히 거지는 물러가지 않고 사정했다. “배가 고파서요, 나리.” “그러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막걸리 한 잔만 베풀어 주시면 전 사발까지 깨물어 먹겠습니다. 원체 배가 텅 비어서요.”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손님이 술 한 잔을 따라 주자, 거지는 그대로 쭉 들이키고는 술 사발을 다시 상에 놓았다. “이봐, 약속이 틀리잖아, 왜 술 사발을 깨물어 먹지 않는 거야” 하고 손님이 말하니까 거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젠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요.”
◇ 중의 마누라와 소실
옛날에 매우 덕이 높아서 신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중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늘, 자기는 석가여래의 가르치심을 충실히 지키기 때문에 이제는 생불이 되어 술,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여자도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자랑하였다. 이 중이 어느 날 볼 일이 있어 저자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한 신도와 만났다.
신도는 중의 가사 소매 속에 병꼭지가 비죽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스님, 그게 무슨 병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 이것 말입니까?” “호호, 스님도 약주를 하십니까?” “아 그런 게 아니고 고기가 좀 있기에 그걸 먹을까 해서 술을 조금 받아가는 것이지요.” “고기도 잡수시는군요?” “아 아니요, 어제 장인이 오셨기에 좀 대접하려는 거요” “스님께선 장인도 계십니까? 한 번도 뵈온 일이 없는 걸요.” “그럴 거외다. 다른 때는 오지지 않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만은 경우가 다르지요. 마누라와 소실이 대판 싸움을 해서 그걸 말리러 와 계시지요”
◇ 술잔은 사발로
정수동이 아침 해장술이 생각나 친구 집에 갔다. 친구는 수표다리 옆 자기 소실 집으로 데리고 갔다. 술상이 나왔는데 그 집의 황홀함에 비하면 초라함이란 콩나물과 깍두기 한 종지만을 가운데 동그마니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앉아 있는데 술을 권하는 것이다. “술상은 이래도, 술맛은 좋아! 어서 한잔 드시게.” 정수동이 손을 들어 술잔을 받아보니 막걸릿잔이 조그만 담배통만도 못하였다. 그런데 정수동이 물끄러미 술잔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별안간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어이! 어이!” 통곡했다. “웬일이요.” 깜짝 놀란 친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 사람아 말 말게, 내가 애통 안하게 됐나, 우리 형님 생각이 불현듯 나서 그러네. 자네는 잘 모르지만 우리 형님은 술을 자시다가 돌아가셨네.”
“술을 마시다가? 그게 무슨 말인가.”
“꼭 오늘의 나처럼 친구네 집에 가서 술을 자셨는데 술잔이 작아서 그만 그 작은 놈이 목구멍에 홀랑 넘어가 버리고 말았지 무언가?” 이 말을 들은 친구는 눈치를 채고 “야 이 사람아, 술잔이 작거든 진작 말을 할 것이지” 했다.
“이 노랭이 친구야, 술잔만은 사발로 해야 할 게 아닌가? 하하하.”
◇ 외상술
술을 먹고 싶은데 돈이 없자, 정수동은 술집에 가서 “여보게, 주모 외상술 좀 주게” 했다. “외상값은 갚을 생각도 않으시고 오늘도 외상을 달라 시니 어쩌잔 말씀이오, 미안하지만 할 수 없소” 주모는 새침하게 돌아서서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하는 수 없이 수동이 한옆의 뒷마루에 가서 멋졌게 앉아 있는데, 마당에 펴 놓은 메밥을 돼지가 와서 마구 먹어댔다. 얼마 만에 주모가 나타나 수동을 나무랐다. “원 선달님도 그래 돼지가 메를 다 먹도록 보고만 계셨단 말씀이오” “허, 이사람, 나는 저 돼지가 맞돈 내고 먹는 줄 알았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정수동이 정월 초하룻날 술집에서 외상을 달라했다. 그러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원 참, 정월 초하룻날 마수걸이에 외상이 다 뭐란 말씀요” 하니 “여보게, 나한테 외상 마수걸이를 하게”했다.
◇ 신 술
하루는 정수동이 술집에 가서 술을 먹는데 몹시 시었던 모양이다. 그 때는 지금과 달라 시다는 말을 못하는 법이었다. 한잔 더 먹을 생각도 안 나고 해서 셈을 치르고 나오는데 술집 주인이 불렀다. “여보시오 선달님, 셈이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됐어? 뭣이” “한잔 잡수셨는데 두 잔 값을 내셨으니 말씀이죠” “아닐세, 틀리지 않네, 받아두게” “아니올시다. 한잔 드리고 두잔 값을 받을 수 없습니다.” “허 이사람 한잔 값은 술값이고 또 한잔 값은 초값일세. 여러 소리 말고 받아두게.”
◇ 부정한 재물을 술로 씻어야
김홍근 대감이 정수동의 집에 세찬을 보냈는데 도주에 하인과 수동이 만났다. 수동은 “여기세찬을 내려놓아라” 하여 그 세찬을 하인과 주거니 받거니 마시게 되었는데 하인이 걱정을 하니, “이것은 이제 대감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 그러니 안주하고 술을 자네도 마음껏 먹게. 이 부정한 재물은 술로 씻어야 하네, 그러니 잔뜩 마셔 둬” 했다.
◇ 술이 오다 깨지다
정 북창(北窓 鄭磏)은 술을 즐겼다.
그는 또 술을 먹으면 예양을 바로 지키며 말의 술수가 능한 사람이었다.
금강산의 어는 절간에서의 일이다. 중이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생기겠소?” 하니, “천하의 진품이 올 것일세” 하였다. “대체 천하의 진품이란 무엇입니까?” “그대는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걸 세” “승속이 동락이라는데 왜 아무런 소용이 없겠습니까?” “오늘 기막힌 술 한 말이 이곳으로 올 것일세, 어떤가 곡차라도 한잔하려나?”
중은 술이 온다는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중은 이 사람이 정말로 술 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저으기 의심하고 있는데, 정북창이 하늘 한 편을 보고 있더니 “아뿔싸, 큰 낭패로군! 허허” 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또 낭패란 말입니까?” “그 좋은 곡차가 오다가 그만 독이 깨져 버렸으니 낭패가 아니고 무엇인가”
◇ 술손님 쫓는 방법
고려 말 조석간(趙石磵)이 강릉 태수로 있을 때 손님이 하도 많이 찾아와 귀찮을 지경이었다. 술맛이 좋으면 손님이 더 자주 오는듯해서 그는 하인에게 누룩을 잘 만들지 말라고 일렀다고 한다. 누룩을 만들어 쳇바퀴에 놓고 잘 밟으면 단단해서 술맛이 좋게 되니 살살 밟으라고 명한 것이었다. 드디어 묽고 흰 형편없이 된 술을 손님에게 권하고는 “술맛이 덤덤하여 귀한 손님에게 권할 수가 없구료” 했다.
어서 가라는 말이었다. “맛이 시구려” 하는 말이 손님에게서 나오면 곧 “술상 물려라, 술솜씨가 형편없구나, 몹쓸 것들”하며 손을 쫒았다고 한다.
◇ 술 이야기에 취한 두꺼비
여우. 너구리. 두꺼비가 무전여행을 떠났다. 하루 종일 굶주린 저녁, 여우가 시루떡 한 그릇을 훔쳐와서, 나누어 먹게 되었는데 성이 안 찬 여우가 안을 냈다.
“내길 해서 이기는 놈이 모두 먹기로 하자. 우리 누가 제일 술에 잘 취하는가 내기하자.” 이에 모두 찬동하여 여우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난 물에다 술 한 방울만 떨어뜨린 것을 먹어도 천지분간을 못하도록 취해 버려! 너구리 너는?” “넌 쎈 셈이다. 나는 밀밭 옆으로만 가도 곤드레만드레야” 그러자 두꺼비가 그 툭 솟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비틀거렸다. “야! 두껍아, 너 왜 그러니?” “얘들아 말두 말아. 너희들 술 얘기에 그만 난 취해 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