作家 芝堂 李 興 揆의 亭中閑談
술과 곡차(穀茶)의 차이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흥얼거린다고 한다. 흥이란 즐거울 때 나온다. 우리 민족은 흥이 많은 민족이다.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함포고복(含哺鼓腹)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흥겨움을 누렸다. 흥에는 반드시 술이 따른다. 아니, 술이 흥을 일으킨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추수가 끝나면 하늘에 제사지내며 사흘 낮밤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주야음주가무(晝夜飮酒歌舞)>의 축제를 벌였다. 이러한 전통은 절기마다 명절을 두고 이어져 왔으며 지역별로 각종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 사가(私家)의 잔칫날역시 마을사람들 모두가 내일처럼 함께 즐기는 풍습으로 정착되어 왔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시절에 구슬땀이 비 오듯 흐르는 한여름 논두렁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갈증을 해소하는 꿀맛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손을 놓고 잠시 한숨 돌리는 참을 술을 마시는 <술참>이라 한다. 술은 노동을 이겨내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유두날(유월 보름)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시원한 시냇가에서 술을 마셨는데 이를 <유두음>이라 한다. 무더운 여름날 고된 일손을 놓고 물가에서 술을 마시며 피로를 푸는 즐거움은 비길 데 없는 살맛이었으리라. 모내기 후에는 세 차례 김 메기를 하는데 마지막 세벌메기를 <만두리>라 하며 이날에는 머슴들에게 새 옷을 한 벌씩 지어 입히고 안주인이 손수 막걸리 한 잔을 따라주었다. 또한 농사일이 거의 끝나가는 백중날(칠월 보름)을 <머슴날>이라고도 한다. 머슴날의 풍속으로 주인집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고 머슴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도록 배려하였는데 이를 <호미씻기>라고 한다. 이처럼 술은 농경과 제사와 놀이에 필수 음식이었다.
술은 모든 사람들이 즐겼다. 왕과 대신들은 궁중연회에서, 선비들은 벗과 더불어 기방이나 정자에서, 무장들은 승전 축배를 높이 들고 저마다 격에 맞는 술을 마셨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의 애주의 일화는 수 없이 많다.
성종 때 재상 손순효는 잘 알려진 주당으로 취하면 호언장담을 하는 술버릇이 있었다. 그의 집은 남산 밑에 있어 경복궁에서 훤히 내려다보였는데 어느 날 저녁 손순효가 자기 집 뜰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성종의 눈에 띄었다. 왕은 즉시 시종을 보내 술과 안주를 하사하며 하루에 석 잔씩만 마시라고 일렀다. 며칠 후 승문원에서 급히 표문을 써야할 일이 생겨 그를 불렀으나 저녁때가 되어서야 대궐로 들어왔는데 술이 만취상태였다. 왕이 대노하여 어찌 왕명을 어겼느냐고 책하자 그는 큰 주발로 석 잔밖에 안 마셨다고 고했다. 왕이 만취상태인 그에게 표문을 쓰라고 명하니 즉석에서 막힘없이 명문장을 지어 올리는 게 아닌가. 성종은 감탄하며 어주를 내렸다고 한다.
세조 때 신숙주는 술에 취해 왕의 팔을 세게 잡아당겨 아프다는 소리까지 나오게 했다. 취중에 안하무인의 불경스런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만인지상인 임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무엄한 짓을 했으니 함께 있던 재상들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특히 세자가 더 그랬다. 그러나 세조는 껄껄 웃으며 괘념치 않았다 한다. 왕도 취한 자에 대해서만은 관대한 배려를 베풀었던 사례다.
선조 때 정철 역시 엄청난 주당이었다. 선조가 아끼는 신하의 건강을 염려하여 은잔 하나를 내리고 이 잔으로 석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명하였다. 정철은 잔을 얇게 두드려 크게 만들어 지니고 다니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다운 일화다.
그러면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깊은 산속 암자에 들어 앉아 수도에 정진해야하는 불가에서는 어떠하였을까?
이름 없는 승려들은 술을 피하며 멀리하려고 애를 썼을 터이나 득도하여 중생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고승들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다는 일화가 심심찮게 전한다. 그중에서도 서산 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난 고승 진묵 대사는 평소에 술을 좋아하며 풍류를 즐겼다. 진묵대사(1562~1633)는 조선의 선조와 인조 때의 고승으로 속명은 일옥이고 법호는 진묵이다. 그는 김제 만경 화포리에서 태어났다. 화포리는 옛날 불거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불거(佛居)가 불개(火浦)로 변한 것으로 부처님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는 불도에만 집념한 까닭에 역사에 크게 드러나지 않아 전설상의 인물처럼 민간인들 사이에 회자되었으나 불가에서는 석가모니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추앙을 받을 정도로 법력이 출중한 스님 이였다. 그가 주로 머문 사찰로는 변산 월명암, 전주 원등사, 대원사 등이다. 그는 사람들이 술이라고 하면 먹지 않고 꼭 <곡차(穀茶)>라고 해야만 마셨다고 한다. 술을 <곡차>라 이름 지은 이가 바로 진묵대사다. 그의 법력이나 술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어느 날, 득남백일기도를 올리려고 찾아온 한 여인에게 곡차를 가져오면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해 주겠노라고 하여 술을 가져다 드렸으나 술만 마실 뿐 한 번도 법당에 들어와 기도염불을 해주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들은 그녀의 남편이 백일기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대사를 찾아가
“스님께서는 곡차를 가져오면 아들을 낳게 기도를 해 주겠다고 약속 하고 매일 곡차만 마시고 기도는 안 해 주시니 너무 하십니다.” 하고 원망하자.
“그래? 그러면 내가 나한들에게 득남을 부탁해보겠소.” 하고는 대뜸 나한전에 들어가더니
“이 마을에 한 보살이 아들 낳기가 소원인데 한 번만 들어주지.”
다짜고짜 나한들의 뺨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그날 밤 여인의 꿈에 나한들이 나타나
“진묵 대사가 어찌나 뺨을 세게 때렸는지 몹시 아프구나. 득남의 소원은 들어줄 테니 제발 다시는 그런 부탁은 하지 말라.”
하고 사라졌다. 그 후 여인은 아들을 낳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서 기도를 올린 후 영험을 보았다고 전한다.
하루는 유학자 봉곡선생이 대사를 초대하여 술과 고기를 가득 차려놓고
“스님께서는 곡차를 좋아하시니 도끼나물을 곁들여 한 잔 하시지요.”
하고 권하니
“고맙습니다. 소승은 술은 아니 마시지만 곡차는 잘 마십니다.”
그는 전혀 사양치 않고 술을 옹이 채 마시고 취하여 시 한수를 읊는데
천금지석 산위침 (天衾地席 山爲枕) 월촉운병 해작준 (月燭雲屛 海作樽)
대취거연 잉기무 (大醉居然 仍起無) 각혐장수 괘곤륜 (却嫌長袖 掛崑崙)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고 산을 베개 삼으니
달은 등불이요 구름은 병풍이요 바다는 술통이로다.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서 흥겹게 춤을 추노라니
행여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염려되는구나.
가히 불도를 통달한 법력 높은 대사의 호걸스런 풍모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컫는 대 선승 경허(鏡虛)선사(1849~1912) 역시 주색을 가까이 한 스님이었다. 그는 수행, 득도, 법력에 있어서 조선 중기 이후의 불가의 인물로는 그를 따를만한 자가 없는 선승이었다. 그처럼 깨달음이 높은 그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기행은 불가의 계율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지탄을 받을 만 한 파계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불가에서는 경허의 그러한 행실을 선승의 무애행(無碍行 ; 얽매임 없는 행동)으로 여겨 언급을 피했다.
이와 같이 법력이 높은 스님들은 술을 술로 마시지 않고 곡차라 여기며 마셨다. 그들이 술에 취했음에도 필부의 행위로 보이지 않은 것은 높은 법력으로 술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들의 만취한 행태가 중생들의 그것과 다름없었을지라도 이는 비몽사몽간에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곡차를 마시고 맑은 정신으로 행한 선승의 무애행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묵대사나 경허선사는 고결한 정신세계에서만 찾았던 기존의 불교에 도전이라도 하듯 모든 이념적 불교사상을 행동화함으로써 불교입신의 새로운 경지를 일깨웠다. 그래서 절이란 어디까지나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불도를 닦는 중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설파하고 사찰에서 불법을 펴지 않고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마을의 정자나 길거리를 택했다. 포교(布敎)를 법당에서 행하지 않고 직접 군중 속에 뛰어들어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행태는 기존 불도에 대한 이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중생을 위하는 것이 불도의 정법(正法)이라 강조하면서 거리낌 없이 실행에 옮겼다. 사실 그들이 사바세계에 뛰어들어 중생들과 통교하기 위해서는 술을 곡차로 여기고 함께 어울려 마시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접근방법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실존사상으로 무장한 고승들이 술을 술로 보지 않고 곡차로 여기고 마셨다는 사실은 술을 마시기 전에 이미 술이 가져오는 광기를 스스로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이 바로 술과 곡차의 차이다.
우리민족은 술에 관한 한 관대한 문화가 뿌리 깊게 이어져 내려왔다. 웬만한 실수는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술을 기피하는 상대에게는 억지가 통하는 음주문화다. 특히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의 회합에는 일체감을 핑계로 폭탄주가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정도에서 멈추어야 한다. 술이란 무작정 취하기 위해 마시기보다는 대작하는 상대와 소통하고 즐거운 만남의 자리 마련을 위하여 음미하는 것이 올바른 주도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는 술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이의 처지를 고려하여 강권하는 음주문화를 지양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글 쓴이 이 흥 규는 ▴한국문인협회 회원▴광주광역시 문인협회 시분과 회장▴해동문인협회 이사▴국제문화교류회 문학부문 문화교육상▴광주전남 아동문학상▴전남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시집 ; 달빛 낚기 외 2권 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