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철학이 녹아 있는 술잔은 보물이다
김원하(본지 발행인)의 취중진담
요즘 주폭(酒暴)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고 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주당들을 마치 주정뱅이로 몰아가는 듯 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주폭자들을 양산한 것(?)은 경찰을 비롯한 사법당국의 책임이 아닌가.
그동안 술 마시고 사고를 친 가해자에 대해 ‘술김에 저질렀기 때문’에 감형을 해준 것이 오늘 날 주폭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라는 생각이 든다.「피고인에게 술을 먹여라」의 저자 서태영 변호사도 판사가 물어보면 무조건 “술 먹은 상태여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라는 것이 법조계의 오래된 관습이라고 했다. 또 일반적으로 ‘가해자가 술김에 그랬으니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사회적 관습이 술의 역기능을 양산하는 계기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술은 백약지장(百藥之長:백 가지 약보다 으뜸)으로 통하는 것처럼 순기능적 역할도 있고, 패가망신(敗家亡身)의 지름길이라는 역기능도 갖고 있는데 마심에 있어 그 경계선을 어떻게 지켜 내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술 마실 때는 마음속에 38선을 그어 놓고 이 선을 잘 지켜야 한다. 그 경계가 바로 채근담에 나오는 화개반개(花開半開) 주음미훈(酒飮微醺)처럼 술은 조금 취하도록 마시는 것이다.
꽃이 완전히 핀 것 보다 반쯤 피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고, 술도 은근히 취했을 때가 가장 기분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 경계를 지키지 못하고 38선을 통과하면 그 때부터는 매우 곤란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술은 거의 쌀로 만든다. 따라서 쌀이 곧 밥이요, 술이었다. 선인들은 술도 음식으로 여겼기 때문에 술을 ‘먹는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누각이나 정자에 모여 술을 돌리며 시도 짓고, 시회도 열어 술은 곧 문학이란 등식을 만들어 냈다.
과거 문학에는 한결같이 술이 게재되어 있는 것이 오늘 날 문학과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술은 문학의 소재이면서 동시에 문인과 문인, 문인과 독자들과 소통했던 매개체였다.
시인 김수영은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 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고 일갈할 만큼 술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벗이요 애인이 아닐 수 없다.
어떻든 간에 술은 순기능 면이 더 많기 때문에 인류역사와 함께 술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술자리에서는 처음 마난 사람에게도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된다. 술의 효능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친화력 기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이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술을 마시면 진담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취중진담(醉中眞談)이 나오는 것이요 시가 나오고 소설이 나온다. 인간의 모든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것이 술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오랜 벗으로 술이 꼽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주는 낭만적 감발(感發)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은 문학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동반자 즉, 술은 문학이란 등식이 성립된다.
술잔 속에는 시와 소설과 철학이 그리고 사랑이 가득하다. 이런 보물을 그대로 버릴 것인가. 가슴에 묻어둬야지. 나이 들면서 배우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제와 생각하면 한창 젊은 나이에 퍼 마시던 술은 풋-술이었던 것이다. 주도(酒道)도 모르고 주량(酒量)도 가름 하지 못하면서 그저 많이 마시면 좋은 줄 알고 30도짜리 소주 됫병(한 되)을 병나발 불기도 했고, 맥주를 짝으로 시켜 놓고 마셔대기도 했다. 술을 탐닉하던 그런 젊은 시절이 지금은 빛바랜 추억일 뿐이다. 다시 그런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젊은 시절이 온다면 술을 제대로 마셔볼 텐데….
조지훈은 일찍이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 낼 수 있다면서 주도에도 18단의 계단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쯤 나는 어느 단을 오르고 있을까.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인 정도는 되었으니 낙주(樂酒)인 16단계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도 마셨고 오늘도 마셨으니 내일은 쉬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술을 마셔야 이 한 몸 다할 때까지 술이라도 즐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