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의 와인교실(2)
와인의 맛과 향
김준철 원장 (김준철와인스쿨)
와인에서 여러 가지 맛이 있고, 꽃과 과일 향이 나온다고 하지만, 실제로 마셔보면, 생각보다 달콤하지도 않고, 떨떠름하면서 시큼하고 퀴퀴한 냄새에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와인 좀 안다는 사람들은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 와인이야말로 지구 상 최고의 음료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왜 그럴까?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좋다고 해서 처음 들어보니까 가냘픈 피아노곡이 잠이 올 정도로 계속 이어지는데, 과연 이것이 그렇게 유명한 곡인가 고개를 갸우뚱 하는 식이나 마찬가지다. 와인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끼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우리가 미술이나 음악을 이해하려면 많이 접해보고, 거기에 대해서 잘 알아야 그 가치를 알고, 느낀 점을 이야기할 수 있듯이, 와인도 많이 마셔보고, 주변 이야기를 많이 알아야 그 가치를 알고 남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와인은 격식으로 마시는 술이 아니고 지식으로 마시는 술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처음 오페라를 볼 때 음악과 스토리가 뒤섞인 것 같이 느끼지만, 클래식 음악을 배우고 즐기게 되면 오페라를 좋아하게 된다. 많이 알면 알수록 그것을 즐기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리라.”라는 문구 역시 와인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모든 와인이 예술?
세상의 모든 와인을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생각하면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그런 와인이 있고 그렇지 않는 와인이 있기 때문이다. 우아하고 향이 오래 지속되는 와인은 아주 비싼 고급 와인에 해당되는 얘기라는 점이다.
좋은 와인과 평범한 와인은 어떻게 다를까? 고등학생이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한다면, 이들은 열심히 연습하여 서툴지만 그런대로 들을만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악평을 하지 않고, 잘 했다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싼 와인의 향은 우리가 반할 만큼 어떤 감흥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마실 만하다 생각하고, “이 정도면 괜찮다.”라는 식의 평이면 된다.
그러나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하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 완벽한 연주를 해야 함은 물론, 지휘자는 어느 부분을 강조하고, 각 연주자의 장기를 잘 유도하여 자기 나름대로 스타일을 표현할 것이다. 고급 와인도 바로 이런 것이다.
고급 와인의 감정
친한 사람들과 비싸지 않은 와인을 마실 때는 즐겁고 편하게 마시면 되지만, 정성들여 만든 와인으로 오래 보관한 와인은 그 맛을 100 % 음미해야 한다.
즉, 와인을 감정할 때는 규격에 맞는 잔을 선택하고 체온이 전달되지 않도록 잔의 아래 부분을 잡고 색깔, 향, 맛 등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먼저, 좋은 와인은 미각을 떠나서 시각적으로 매력적이고 광택이 나야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은 와인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이것도 옛날 말이고, 요즈음은 모든 와인이 아름다운 색깔에 보석의 반짝임이 나타날 정도로 투명하기 때문에 겉모양에 문제 있는 와인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와인의 향과 맛
다음은 잔을 서서히 돌리면서 코밑에 갖다 대고 향기를 흠뻑 맡아야 한다. 코가 식별할 수 있는 향기는 혀가 맡을 수 있는 맛보다 몇 십 배 세밀하기 때문에 이 향기를 맡는다는 것은 와인을 감상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질의 와인일수록 향기가 평범하고 약하며, 좋은 와인일수록 복합적인 향기가 오래 지속된다.
와인이 풍기는 향기는 아로마(Aroma)라고 하는 원료포도 고유의 향기와 부케(Bouquet)라고 하는 발효와 숙성과정에서 생기는 델리케이트한 향기를 말한다. 와인의 품질은 이 향기에 의해서 품질이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마실 때도 꿀꺽 삼키는 것 보다는 이왕이면 서서히 입안에서 굴리면서 음미하는 것이 좋다. 신맛, 떫은 맛, 단맛 등, 조화된 맛과 입안에서 코로 전달되는 향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조화된 복합미를 음미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맛이라고 느끼는 것은 혀에서 느끼는 미각과 입에서 코로 전달되어 느끼는 향을 합쳐서 말하며, 이것을 ‘향미(Flavor)’라고 한다. 보통 맛의 80 %는 코에서 느낀다고 하며, 감기가 걸려 후각의 기능이 떨어지면 밥맛이 없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까 와인의 맛은 혀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코로 맡을 수 있는 향기와 함께 조화된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향과 맛은 관심을 끌어야 하며 베일을 벗기듯이 갈수록 더 해야 한다. 와인을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향미가 좋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좋은 와인이란 전문가들이 말하는 향속의 향 즉 복합성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서로 다른 맛이 있으면서 일부는 숨어있는 향미로서 서서히 그 향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영 와인은 신선감이 있어야 하며, 아주 경쾌하고 포도의 향을 듬뿍 내뿜어야 한다. 오래 된 와인은 나무통과 병에서 숙성되면서 점차적으로 형성된 향이 뭔가 흥미를 자아내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있어야 한다.
표현은 솔직하게
그러나 와인의 맛을 묘사하는데도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하더라도 과감하게 맛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해도 흠 될 것은 없다. 향이란 개인에 따라 선호도나 느끼는 정도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그리고 보지도 않은 외국 과일 이름을 나열하거나 지나친 문학적인 표현도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와인의 향을 표현하려면 다른 사람이 고개를 끄떡이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테이스팅이란 “와인을 시각적, 미각적, 후각적으로 검사하고 분석하여, 느낀 점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설사 내가 블랙커런트 향을 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모르면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가장 맛있는 와인은?
그러니까 와인의 좋고 나쁨에 대한 기준은 없다. 우리의 기호는 경험과 연령,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처음엔 싫어했다가 나중에 좋아하는 경우도 있고, 장소나 시간이 바뀌면 또 달라진다. 와인의 맛은 영화 감상에 비유할 수 있다. 친구가 재미있다고 추천해도 나에게는 감흥을 주지 못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우연히 본 영화가 의외로 감명 깊은 것도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명화는 따로 있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개인 별로 입맛에 맞지 않는 와인이 있을 수 있지만 명품 와인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이란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 될 수밖에 없다. 가을은 모든 사물이 성숙해지면서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게 만든다. 조용한 음악과 그윽한 향에 어우러져 취해서 가을의 정서를 즐기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와인의 맛, 시가, 시, 산문 등에 대한 기준은 없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취향이 기준이며, 대다수의 의견이라도 어떤 사람에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며, 그 사람 고유의 판단 기준에 지극히 적은 정도라도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 마크 트웨인, 1895
필자:▴김준철와인스쿨(원장)▴한국와인협회(회장)▴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프레즈노캠퍼스 와인양조학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