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이 간다
임 재 철 칼럼니스트
겨울, 개인적으로는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지만 가장 낭만적인 시간이다.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고 코끝에 김이 서리고 겨울 특유의 냄새로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느새 성큼 연말 시즌이고,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감을 느낀다.
우리 인생에서 올해는 또 어떤 해로 기억될까? 2022년은 유난히 시간이 길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은 살면 살수록 잘 모르겠고,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고, 예기치 못한 고난의 연속인 것 같다. 지난여름에는 친구들이 멀리 떠나고, 일년 내내 병원 신세를 지고…, 그래도 묵묵히 살아왔다. 말하자면 산다는 건 고마운 일이고 시시각각 도전하고 힘들지만 살아있는 축복으로 한 해를 보내게 한 신의 가호에 감사하다.
매년 12월이 되면 누구나 조금은 무겁고 숙연 해진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뛰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뒤돌아보면 언제나 부족함에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하필 12월이 겨울이니 더욱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올 한 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마지막을 정리하고, 매너 있게 즐거운 숙명과 마주하며 도끼를 가는 시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또 해가 바뀔 때마다 하는 일상일지 모르겠다. 비록 도돌이표가 거듭되는 ‘링반데룽(Ringwanderung)’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다 또 새해가 그냥 찾아올 것이지만, 아직은 올해와 헤어질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가령 감각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연말로 가는 지금 좀 더 기분을 내고 싶어서 집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지난달 물 건너에서 누가 보내준 곡주를 한잔 들이켜니 일이 터졌다. 한 때는 폭탄주 문화에 익숙했던 필자이지만, 아무튼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 같다.
하지만 연말의 ‘진한’ 맛인지도 모르겠다. 고량주를 한 잔 하며 글을 쓰는 지금, 스스로 여러 건배사를 되뇌게 되니 말이다. 우선은 빠르다고 세월 흐름이 참 빠르다고 한숨을 쉬기보다 또 다른 세상에 바람 불 좋은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나온 시간이 고통이었다면 새날들에는 바람이 꽃을 피워서 우리네 삶에 새로운 희망을 뿌려 주는 12월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과 인생관이 다르기에 12월의 생각뿐만 아니라 술 맛의 정취와 재미를 느끼는 감성도 차이가 있다. 다사다난했던 사계절을 보내며 한편으론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연말의 설렘보다는 아쉬움이 많은 시절이지만, 여하튼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한 잔에 취하는 12월의 밤, 한 해 동안 고생한 자신을 토닥이며, 마음속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과 또 마주하게 될 여러 일들이 있으니 충분하다는 것을, 그리고 각기 마음속에 품은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혹자는 말한다. 연초 세운 계획들을 잠시 돌아보라고…, 그러나 대개는 모래 탑처럼 무너져버린 것이 많을 것이다. 여러 게으름을 말하려는 게 아니지만 우리가 지나가버린 것보다는 이 겨울에 차가운 어깨 토닥여 주며 따뜻한 손길로 서로 힘내라고, 열심히 살았으니 용기를 내라고 서로 마주치는 술잔과 눈길에 사랑이 피어났으면 좋겠다. 그저 마주치는 ‘건배’의 정취처럼….
연말이고 또 곧 연시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감염 병으로 여전히 불편하기는 하나 다시금 모임이 많아지고 있는 시기이다. 그렇다고 연말의 분위기에 너무 취해 몸을 상하면서까지 많은 술을 마실 필요는 없다고 본다. 최적의 술은 애써 올 한 해를 걸어온 자신을 위한 한잔, 그리고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편하게 눈을 마주치며 한잔하면 충분하다.
옛날 중국 속담에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핵심은 즐거운 술도 걸어 다녀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러 짐을 지고 헤치고 걸어 나아가야 하지만 눈을 돌려 주위를 보면 올 12월은 이런저런 감성이 사라진 듯하다. 한마디로 이 땅은 겨울공화국이다. 모든 곳이 꽁꽁 얼어붙어버렸다. 혹독한 경제 한파에 세상이 점점 회색이나 고동색으로 을씨년스럽다.
우리가 흔히들 곧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를 ‘독일 병정’이라고 한다. 독일을 여행하면서도 체득한 게 많지만, 독일사람 특유의 원칙에 충실하고 근검·절약하며 다소 늦지만 매사에 정확한 기질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즉 독일인들이 지나치게 정직해 융통성이 없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이나, 독일이 유럽을 호령하는 일등 국가가 된 힘은 그들의 이러한 강직한 내면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과 일본인도 이와 유사한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아날로그적 일본인의 근성과 기질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싫다고 입버릇처럼 떠들지만 많은 한국인이 일본을 자주 찾는 것도 단순 관광 이외에 배울 것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예컨대 우리가 일본을 여행할 때 느끼는 거지만 도로에 굴러다니는 차를 보면 대형차는 고사하고 중형차도 찾기 힘들다.
물론 그들도 부자들은 대형차를 탄다. 그렇지만 그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한 우리와 비교하면 극히 대조적이라 하겠다. 어쩌다 자동차가 비극적인 실례가 되어 씁쓸하지만, 중국의 고량주가 익어가니 갑자기 입가심으로 맥주가 생각나 독일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홀로 마시는 술이지만 한잔 들어가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영원한 자유인, 시선(詩仙) 이백의 <將進酒>라는 말이 너무나 적실히 저며 온다. ‘삶이란 지나가는 길손이요 죽음이란 돌아가는 사람이라(生者爲過客 死者爲歸人)’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 해졌는데 오로지 술꾼만 그 이름 남기었네(古來聖賢皆寂寞 惟有飮者留其名).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필자이지만 위대한 시인의 정신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몸으로 낯선 장소와 문화를 체감해야 비로소 내가 누군지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12월의 화두를 바꿀 것인가? 부지런히 우리를 둘러싼 변화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서 기다릴지, 누가 다시 역사를 다시 쓸지, 또 모를 일이다. 말하자면 허무한 게 인생이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인지라 살아있는 한, 맘껏 마시면서 맘껏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