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글라스

김준철의 와인교실(10)

와인글라스

 

김준철 원장 (김준철와인스쿨)

 

 

여왕을 흠모한 장군

 

김준철와인스쿨(원장)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처녀로 지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어찌 남자들의 유혹이 없었을까? 이 여왕을 사모하는 장군이 있었는데, 여왕은 그 많은 사람 중에 하나려니 하고 무관심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 않고 자꾸 치근대는지라, 어느 날 저녁 여왕은 이 장군을 집으로 초대했다.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여왕을 기다리고 있는데,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왕이 금 쟁반에 사과를 깎아서 가져오더니, 잠깐 사과를 들면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사과를 다 먹고 나니까, 이번에는 은쟁반에 사과를 가져와서 들라고 하고 또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바쁜 일이 있나보다 생각하고 사과를 먹어치웠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이번에는 구리쟁반에 사과를 가져와서 좀 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내가 사과를 대접받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닌데…”라고 투덜대면서도, 왕의 명령인지라 사과를 먹으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연거푸 사과를 세 접시나 먹고 한참 기다리면서 인내의 한계를 느낄 무렵, 드디어 여왕이 웃으면서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쟁반의 재질에 따라 사과 맛이 달라질까?

 

여왕은 “어느 쟁반의 사과가 가장 맛있던가요?”라고 물었다.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서 여왕을 기다리다 지친 장군에게 사과는 관심 밖이었다. “어느 것이나 맛이 똑같던데요. 뭐~” 장군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했다. 이에 여왕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금 쟁반에 있는 사과나 은 쟁반에 있는 사과나 맛이 똑같은 것처럼, 여자도 왕이든 평범한 여인이든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다. 장군이 금 쟁반에 있는 사과가 가장 맛있더라고 얘기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와인글라스도 마찬가지다. 값비싼 고급 글라스에 있는 와인이 더 맛있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비싼 글라스라고 알고 마시면 맛이 더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와인글라스의 유행

 

테이블에서 지금같이 와인글라스를 하나의 모양으로 갖추는 풍습은 18세기 들어와서 영국 상류층에서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탈리아는 16세기부터 글라스를 사용하였지만, 그전에는 한 자리에서도 여러 가지 모양의 잔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글라스’라고 부르는 유리잔은 귀했고, 대개는 불투명한 금속이나 동물의 뿔로 만든 잔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 때 석탄 등의 연료로 높은 온도로 유리를 가공하여 단단한 유리가 나오면서 실용화 단계로 접어들었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잔 즉 글라스를 얻을 수 있어서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또, 만찬도 뷔페식으로 모든 음식을 차려놓고 먹던 방식에서 식탁으로 하나씩 서비스하는 방식으로 변하면서, 주최 측에서 음식과 와인에 대해 세심하게 준비를 했고, 준비한 와인과 음식의 특징을 살리고자 여러 가지 유리그릇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과시욕구도 생기게 되고, 와인도 투명한 유리 잔 덕분에 맑고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되어, 여과나 정제 방법이 발달하였고, 이때부터 와인의 투명도와 색깔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와인글라스의 형태

 

와인글라스는 무색투명하면서 볼이 넓고 입구가 좁은 튤립 모양 즉, 계란을 위에서 1/3 정도 자른 듯한 모양이면 된다. 색깔이나 무늬가 있으면 와인의 색깔을 보는데 방해를 받고, 입구가 좁아야 와인의 향이 밖으로 분산되지 않는다. 결혼 선물로 받은 조잡한 와인글라스는 선반에 있을 때는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좋은 와인 마시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와인글라스는 시각과 후각을 만족시켜야 한다. 특히, 샴페인은 시각을 만족시키는 형태라야 하는데, 바닥에 있는 작은 돌출부에서 와인의 거품이 위로 올라오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긴 튤립 모양이나 플루트 모양 어느 것이나 상관없지만, 어떤 것이든 품위가 있어야 한다. 대접같이 생긴 샴페인 글라스(트로이의 헬레네 유방 모형이라고 알려진 것)는 쉽게 넘칠 우려가 있고, 오래 지속되어야 하는 샴페인의 부케와 거품이 빨리 사라져 버린다.

 

또, 까다로운 사람들은 보르도, 부르고뉴, 독일, 소테른 등 와인 종류에 따라 각각 글라스를 다르게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옛날에 그랬다는 것이고, 구태여 거기에 구애 받을 필요는 없다.

비싼 글라스가 와인 맛을 더 좋게 만든다?

 

값비싼 고급 와인글라스에 있는 와인이 더 맛있을까? 기왕이면 값비싼 글라스가 더 좋긴 하겠지만, 비싼 글라스가 와인의 맛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털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고급 와인을 고급 와인글라스에 따라 마시면 더욱 맛이 좋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때도 마시는 사람이 고급 와인글라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맛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도 없다. 와인 맛은 기분에 따라서 변한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와인글라스의 크기다. 와인글라스에는 어느 정도의 와인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작으면 한입에 다 마시고 기다리게 되므로 분위기가 어색해지며, 또 따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요즈음은 우리나라에서는 요강만한 큰 와인글라스가 유행하고 있다. 꼴불견이지만, 이야기하면서도 글라스를 흔들어 향을 음미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와인글라스 모양에 따라서 와인이 혀에 닿는 위치가 달라진다?

 

외국의 유명 메이커에서는 와인글라스의 형태에 따라 와인이 혀에 닿는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와인글라스 선택에 주의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동일한 모양의 글라스라도 사람의 얼굴과 입 모양이 천차만별이라서, 와인이 혀에 닿는 위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치에 맞는 주장은 아니다. 저들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으려면, 각자 얼굴 형태에 따라 글라스를 설계하여 주문제작한 자기 고유의 글라스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럴싸한 이야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금 쟁반은 아니더라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와인글라스의 청결상태이며, 특히 샴페인의 경우는 더욱 깨끗해야 한다. 글라스를 세제로 씻으면 안 된다는 사람도 있지만, 기름기를 씻어내려면 반드시 세제가 있어야 한다. 단, 남아있는 세제를 완벽하게 제거해야 하고, 약간 물기가 있을 때 천으로 잘 닦아서 얼룩을 제거하고 거꾸로 걸어 놓으면 된다. 가정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으므로 먼지나 얼룩이 끼기 마련이라, 손님을 맞이하기 전에 위와 같이 깨끗이 씻어야 한다. 청결한 글라스도 손님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필자:▴김준철와인스쿨(원장)▴한국와인협회(회장)▴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프레즈노캠퍼스 와인양조학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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