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 속에서 술을 즐기는 도연명
박정근(문학박사, 작가, 시인, 황야문학 발행인)

필자는 문인으로서 술과 관계된 친구들이 많다. 은퇴를 한 후 더욱 친구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지고 정겹다. 사실 살아가면서 형식과 격식을 지켜야 하는 신분인 탓에 만남 자체가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하지만 청년 시절을 함께 지낸 동창생이나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문인들은 형식적인 제약보다 속마음을 나눌 수 있어 편하다.
그들과 자유롭게 주고받는 토론을 하다보면 자연히 술이 등장한다. 외적 제약이 없는 상황은 주량의 한계를 통제하려는 의식을 내려놓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날은 필연코 술에 취해 버려 밤늦게 귀가하게 된다. 물론 아내의 잔소리가 뒤따라와 술자리가 주었던 낭만성을 훼손하지만 술과 함께 즐겼던 시간은 여전히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물론 술을 적당히 마시고 상대방에게 실수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술을 마시려는 의식을 갖출 수 있다면 좋으리라. 논리적으로 즐기는 술을 오래 마시려면 장수해야 한다. 또한 장수를 하려면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적 논리가 나온다. 하지만 건강을 지키려면 술을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과 술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관계가 동시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술꾼이 매번 당면하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적 삶이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도연명의 무위적 삶에서 일부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다. 도연명은 술을 사랑했으며 술을 즐기기 위해 장수하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다. 매일 술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장수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그가 즐기던 무위적 삶과 자연 그리고 술이야말로 그의 삶의 필요충분조건이었으리라. 그러한 세 가지의 조화로운 공존이 바로 그의 삶의 의미였으며 스트레스가 제로 상태인 이상적 삶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유일하게 술이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인생의 유일한 동반자라고 토로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곽주부에 화답하여 和郭主簿>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營己良有極,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제한되어 있어
過足非所欽. 넘치는 만족을 소원할 수 없네
舂秫作美酒, 차조를 찧어서 맛있는 술 빚었으니
酒熟吾自斟. 술이 익으면 저절로 잔을 기울이리라
사실 도연명은 경제적으로 무능한 문인이었다. 시를 쓰는 시인이 돈을 버는 능력이 출중하다면 배를 골치 않으니 좋으리라. 하지만 경제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시인은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없다. 계산적인 두뇌에서 시적인 상상이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보다 시적인 삶을 우선했던 도연명은 항상 허덕이는 삶으로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잡시 雜詩>에서 “겨울 추위는 거친 천으로 막으면 되고 / 뙤약볕은 거친 갈포로 가리면 족하련만 / 그것마저 얻을 수 없으니 /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프고나 ”라고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문명의 혜택이 거의 없는 무위적 삶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결핍의 삶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는 무위적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런 궁핍을 술과 함께 즐길 줄 아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人皆盡獲宜, 사람들은 모두 편안히 지내고 있는데
拙生失其方. 무능력한 나는 생계를 꾸릴 방도를 모르네 .
理也可奈何, 세상의 이치야 어찌 하겠는가
且爲陶一觴. 그저 술이나 한 잔 마시자꾸나.
그의 시는 필자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궁핍한 삶을 즐기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술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디오니소스적 해방감을 만끽하면 그의 기본적 욕구가 총족되었다. 그는 궁핍을 타인과 관계를 통해서 해결하거나 투쟁하려고 하지 않았다. 조그만 밭에 술을 담가먹을 조를 심어서 음주의 최소조건을 해결하였다. 그러한 무위자족적 삶이 궁핍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