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외설은 바람직한가

 

술자리에서 외설은 바람직한가

 

박정근 (문학박사, 작가, 시인. 황야문학 주간, 연출가)

 

필자와 50여년 교유한 술친구가 있다. 대학원 시절에 만났으니 죽마고우라고 칭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만나 줄곧 함께 술을 마시며 문학을 토론하며 즐기며 지내왔다.

그는 문학을 한 탓에 좋은 입담을 지니고 있다. 필자는 그에게 여러 층의 친구를 소개하고 함께 술을 나누기도 했다. 그에 대한 친구들의 평판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하곤 한다. 그 평판은 주로 그의 언행과 관련이 있다. 필자는 그에 대해 긍정보다 부정의 치수가 자꾸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고자 한다.

 

긍정적인 면은 그의 파격적 언행을 통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인 도덕관념을 무시하는 그는 사회적인 체면을 의식하는 사람의 상상력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뒤에서 별별 짓거리를 하는 자들이 겉으로 점잖은 척 위선을 떠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하위라고 볼 수 없으리라.

특히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인 농담을 즐기는 일종의 우상타파의 주인공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사회학적으로도 타당하다고 본다. 여하튼 그는 통상적으로 입에 담기 힘든 외설적인 이야기를 쏟아놓는 놀라운 기질의 소유자이다. 친구들은 상상을 불허하는 그의 기행과 언행에 놀라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다.

술친구가 좌중을 뒤흔드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싱글싱글 웃어가며 좌중들에게 섹스와 성기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뻔뻔함을 특유의 장기로 가지고 있다. 범인이라면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당당히 말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묘한 이중성을 지닌 존재이다. 금기를 어기는 것이 비도덕적이라는 강박관념을 교육을 통해 체득하고 있다. 아이러닉하게도 금기에 대한 반응은 사회적인 장소 또는 사적인 장소에 따라서 달라진다.

학교나 공공장소 같은 점잖은 공간에서 그런 외설을 떠들어댄다면 아마 대단한 혹평을 늘어놓았을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고삐 풀린 말들이 술집 등의 사적인 사교 장소에서 펼쳐진다면 웃음을 선사하는 그에게 박수가 쏟아진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적 욕망을 사회적 질서를 위해서 금지한 것이 개인적으로 심리적 억압이 되어 불편하게 하곤 한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싶지만 체면과 사회적 윤리를 의식해 참았던 금기어들을 누군가 타인이 자연스럽게 풀어준다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을 술친구가 고맙게도 해주니 귀가 솔깃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술 한 잔 걸치면 더더욱 좋으리라.

인간은 금기시되어있는 말들을 의식적으로 멀리한다. 금기의 말들을 발화하면 도덕적으로 공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 언행을 할 때 자기 검열의 과정을 거친다. 그들의 사회적인 마스크인 페르소나가 작용한다고 본다. 적어도 자신은 사회적인 금기를 지키는 존재로서 구성원으로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입담으로 웃기는 친구들의 희극적 전략은 일종의 까발리기이다. 즉 자신이나 남의 치부를 드러내어 즐기거나 조롱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양반전”이라는 전통극에서 말뚝이가 양반의 위선적인 부도덕을 까발릴 때 민중들이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소위 “외설”이라는 성적 유머도 체면 때문에 숨기려는 성적인 이야기를 들추어내어 인간의 억눌린 욕망을 해소시켜주는 효과를 지닌다. 드라마에서 희극배우는 인간의 이런 속성을 적절히 이용하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그럼 우리의 술친구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술친구와 함께 만난 산꾼들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 여성들은 가정에서 살림을 하는 까닭에 아내나 엄마로서 도덕률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의 주전자는 동물적 존재로서 항상 끓기도 하고 식기도 한다.

욕망의 언어도 동시에 오르고 내리는 현상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금기나 통제가 의식 속에서 항상 가동한다. 대조적으로 그들의 가슴 속에서는 억압된 욕망을 풀어헤칠 기회를 찾고 있다. 그것이 술자리이건 산행길이건 사회적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라고 확신하면 비등점이 높아진 수증기처럼 탈출구를 찾으려고 한다.

마침 술친구가 술을 한잔 걸치고 천연덕스럽게 외설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여성의 성기나 음모에 대해서도 마치 성의학자처럼 진지하게 설명을 떠벌린다. 부부가 서로의 청결함을 위해 면도칼로 상대방의 음모를 멋지게 제거해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희극적으로 묘사하면서 말이다. 남성은 남성끼리, 여성은 여성끼리 외설을 즐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강도가 높은 해방감이 그들을 흥분시키기 시작한다. 술친구로 인해 술자리가 갑자기 성적 해방구로 변해버리자 여성들의 시선은 온통 술친구에게 쏠린다. 다른 남성 참석자들은 약간 어처구니가 없어 그저 술자리의 적당히 느슨한 성적 해방감을 만끽할 뿐이다.

 

하지만 외설이라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야 한다. 술도 취했기에 성적 호기심이 좌중들에게 뇌살적인 성적 환상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환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너무 단 음식을 먹으면 금방 물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좌중들은 술친구가 늘어놓는 외설이 점점 참신한 맛을 잃어간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인식은 너무 노골적인 외설적 영화를 볼 때 체험할 수 있다. 여성의 노출도 아슬아슬한 정도에서 수준이 놓은 미학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사실 술친구가 취중에 늘어놓은 외설이 여성들에게 잘 먹히고 일시적으로 인기가 좋고 술꾼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산에서 내려와 땀을 식히며 맥주를 마음껏 들이키며 뇌살적인 외설을 듣는 것은 우리 술좌석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외설의 내용은 금방 흥미를 잃어갔다. 노출이 심한 영화나 그림이 시간이 지나면서 물리듯이 말이다.

만약에 외설이 필요하다면 좌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의미에서 살짝 양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외설로 일관하면 처음에는 웃을지 모르지만 점점 외설의 강도가 높아가도 재미를 상실하기 쉽다. 또한 술자리에 참여한 친구들의 자존감으로 외설이 식상해지고 모임에 빠질 수 있다. 또한 미팅에 두어 번 참여하다가 거리를 두기 십상이다. 외설은 사회적 율법이 개인의 욕망을 지나치게 억압하여 삶의 활기를 상실하는 것을 방지하고 즐거운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축제적 양념으로 적절하게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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