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술병』
갑진년 정월부터 젊은이가 더 즐기는 ‘우리 술’문화
육정균 (시인/부동산학박사)
2024년 갑진년 새해가 밝아온 지도 어느덧 중순을 치닫고 있다. 우리의 경우 새해의 진한 맛은 2월의 설날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예로부터 ‘도소주(屠蘇酒)’를 가족과 나눠 먹는 풍습이 있었다. 도라지, 계수나무 껍질 등 온갖 약재가 들어간 자양 강장 약술이기 때문이다. ‘도소주’는 어린아이도 한 잔 거뜬히 비울 만큼 단맛 나는 술이다. 새해가 밝아오면 세계 각국에서도 나라마다 세시풍습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프리미엄 맥주인 ‘에비스’를 선물로 주고받는다. 부귀와 번영을 상징하는 붕어의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열도 내에서 ‘새해에 가장 선물 받고 싶은 선물 1위’에 꼽히기도 할 만큼 일상적인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위스키 병을 집어 든다. 새해를 맞기 전 위스키병을 들고 있으면 병이나 악재 등을 막을 수 있다고 믿어서다. 매년 12월 29일부터 1월 1일까지 ‘호그마나이(Hogmanay)’라 불리는 축제에 참가하기도 한다. 특히 31일 이른 저녁부터 첫해가 뜨는 순간까지 위스키를 마음껏 마시고, 시계가 1월 1일 0시를 가리키는 순간 전통 민요를 다 함께 부르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집에 남아 있는 와인을 모두 마셔버린다. 해가 바뀔 때 집에 술이 남아 있으면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터부 때문이다. 맥주의 고장인 독일에서는 의외로 샴페인을 터트리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설날 아침에 마시는 ‘도소주’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온 가족이 동쪽을 향한 다음 어린아이부터 시작해 차례대로 제일 연장자인 어른 순서로 마신다. 어린아이가 마실 수 있고, 또 아이들이 먼저 마시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다. 먼저 ‘도소주’의 한자를 풀이해보자. 때려잡을 도(屠), 사악한 기운 소(蘇), 술 주(酒)를 쓴다. “사악한 기운을 때려잡는 술”이란 뜻이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악한 기운은 전염병을 말한다. 당시엔 전염병이 가장 무서운 질병이라서 전염병에 약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부터 마시게 했다. 아이들까지도 마실 수 있었던 것은 ‘도소주’를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12월 그믐이 되면 백출, 길경, 대황 등 10여 가지 약재를 붉은 주머니에 싸서 우물 속에 담가 둔다. 다음날인 정월 초하루 새벽에 이를 꺼내 팔팔 끓고 있는 청주에 넣어 우려내어 마셨다. 청주를 끓여 알코올을 날려버렸기에 아이들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새해 첫날 ‘도소주’를 마시면 1년 내내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끓고 있는 청주에 우려내고 남은 약재 주머니는 다시 우물에 담가 두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온 동네 사람들도 똑같이 일년내내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액땜으로 마시는 술은 또 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 일찍 마시는 귀밝이술이다. 아침에 찬술(淸酒)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 술 또한 어린아이가 아니면 온 가족이 한 잔씩 마셨다. 한 해 동안 귓병 없이 좋은 소식만 듣도록 염원하는 의미가 있다. 다만, 귀밝이술은 ‘도소주’처럼 따로 빚지 않았다. 설날 차례상에 올리고 남을 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정월 대보름날 부럼을 깨고 귀밝이술을 마시는 전통은 유지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납월, 즉 음력 12월에 빚어 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마시는 술인 납주(臘酒)를 마시거나 ‘도소주’를 마시는 전통문화를 이제는 거의 볼 수 없어 아쉬움이 컸는데, 최근 서서히 살아나고 있어 아름답다.
술과 관련한 풍습이나 터부 역시 한 문화권의 특정한 역사, 철학, 경제 등 사회적 풍토가 반영되어 만들어진 독특한 문화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마시는 1월의 술은,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에 조금 불확실해 보일지라도 전통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문화권이라는 단어가 개인의 영역으로 좁혀졌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전통주가 MZ세대들로부터 인기를 끌며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한‘힙한 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또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전통주의 세계화를 말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선 스토리텔링이 필수다. 다행히 납주나 도소주, 귀밝이술 같은 세시풍속 속의 절기주(節氣酒)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번 정월에는 많은 전통주 양조장에서 납주를 빚고 ‘도소주’를 개발해서, 시음하고 시판해보면 어떨까. 설날 선물용으로도 이만한 의미를 담은 건 흔치 않아서이다. 전통주는 젊은이들이 좋아해야 발전할 수 있다. 무겁게 느껴지는 ‘전통주’라는 말보다는 ‘우리 술’이 더 친근하다. 젊은이들이 편하고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술이어야 한다. 하지만 전통주는 나이 드신 분들이 먹는 술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지배적이다. 이것부터 깨야 한다. ‘우리 술’이 젊은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려면 젊은 문화를 만나 더욱 젊어져야 한다. 최근 서울 강남이나 인사동 등에 들어서는 세련된 전통주점들을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다니 다행이다. 젊은이들과의 접촉면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우리 술’ 하면 “바로 이곳이야” 하는 곳이 많이 늘어나야 젊은이 속으로 더 파고 들어갈 수 있다. 홍어와 막걸리 ‘홍탁’, 비 오는 날 파전과 막걸리 ‘파막’ 등 젊은이들에게 조금 낯설지만 ‘우리 술’에도 젊은이들이 점잖고 알맞게 먹으면서도 열광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우리 술’문화에 미래가 달렸다. 젊은이들에게 더욱 다가가기 위한 더 많은 시도는 ‘우리 술’의 무한 변신과 참신하고 건전한 술 문화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 육정균 : 충남 당진 出生, 2000년 작가넷 공모시 당선, 2002년 현대시문학 신인상(詩), 2004년 개인시집 「아름다운 귀향」 출간, 2005년 현대인 신인상(小說), 부동산학박사, (전) 국토교통부(39년 근무) 대전지방국토관리청 관리국장(부이사관) 전 개인택시공제조합이사장, 단국대학교 부동산건설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