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건 시간뿐

흐르는 건 시간뿐

 

임재철 칼럼니스트

 

시간이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간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최악의 정부를 경험하고 있지만 시간은 잘도 간다. 술술, 흐르는 건 시간뿐, 그저 모르는 채 나그네 길을 걸어가고 있다. 세월의 저 너머를 뒤돌아보면 내비게이션도 없고 지도조차 없는 울퉁불퉁한 길과 굽어진 길, 아스팔트 길, 실패한 길, 갈수 없는 길이나 가지 않은 길을 빼고는 달려왔다. 시간이 갈수록 저 멀리 모향(母乡)이 보이고 그리움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정말 세월이 유수와 같다. 이 또한 인생길이며 나그네 길이기에 흐르는 물결 따라 때로는 물결 위로 수면 아래로 오르락내리락 시간에 기대어 살아왔건만 어느새 많은 세월이 흘렀다. 시간은 무척 빠르고 거침없다. 살아간다는 건 길을 떠나는 것이고 끝도 없는 그 길을 가는 거라지만, 세상에서 가장 야속한 것은 아마도 시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잔잔하게 그늘에 몸을 맡기면서 걸어가는 다동나그네인 필자 역시 살아온 세월의 굴레에 여지없이 허무하고 우울하다.

 

아쉬움 가득한 그 많은 시간들과 나약한 마음이 숨겨놓은 이야기처럼 뭉실뭉실 떠오르니 문득 언젠가 읽었던 다자이 오사무의《인간실격》이 뇌리를 찌른다. 이를테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생각하게 된다.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사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 우리네 세상살이다. 누군가 기억한들, 그 사람도 굽이굽이 조만간 세상 속으로 스러진다.

 

나이가 들면 지난 인생 조각의 기억이 또렷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흐려진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탓일 거다. 그리고 신산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년에 접어들면 옛 대중가요나 추억의 팝송 음색이 시리다. 백호 형이 말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50년 전도 어제고, 30년 전도 어제다. 그러니까 시간이 중첩되어 흐르고 있을 뿐. 지나간 시간 속에서 서성대는 필자를 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앞에 젊은 청춘은 온데간데없고 세월의 더께에 하얀 백발과 주름뿐인데다 무엇 하나 쉽지 않고 그저 눈먼 장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거늘 어쩌겠는가. 물론 흐르는 강물처럼 그게 운명대로 사는 일이며, 평범하고 평화로워서 감사한 일상들일 수 있겠지만 별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힘은 오히려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듯 다른 방향, 재해석, 다른 길, 새로운 시각, 그리고 반대편에 분명 새로운 길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터리, 오늘(Present)은 선물이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

 

법정 스님의《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보면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낡은 자로서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행간의 글에 허전해질 정도로 구멍이 나고 허름한 옷깃만 쓰다듬고 있지만 머리에서 가슴으로 두 발로 깊은 사색의 시간, 닳지 않는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기억의 필름을 뒤적여 보면, 지난 한 달 동안 토해내듯 징그럽게 퍼부었던 열대 우림의 폭우와 장마가 요란했던 것처럼 살아온 나날이 그러했다. 삶의 여정과 흔적도 그러했다. 하여 비바람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냥 바라보기만 했고, 그랬더니 어느 순간 그 소리 그치고 고요함이 가득 했지 않았던가.

 

시간이 흐르고 삶이 흐르고, 지금 우리가 아열대, 아니면 열대 우림 기후 속에 살든 삶은 삶인 것이다. 필자 역시 부족함이 너무 많아 한가지도 달관한 게 없는 휘청 이는 나그네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흐르는 시간속에서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다짐이다. 혹자는 말한다. 세상의 시간은 공평하다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얽히고설키는 세상,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는 걸 알고, 그 시간을 깊게 느끼며, 연습이 없는 인생 무대를 채우는 거다.

흐르는 시간 속에 여전히 진행형인 나그네 길, 때문에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을 사는 거다. 소설가 박경리 씨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젊어 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이른바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는 물처럼 살다 간 사람이다. 다시 말해 상선약수의 삶을 살았다.

아아, 흐르는 건 시간뿐!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의 시계가 빠르게 간다지만 여름의 절정 8월의 빈 하늘이 무한이 넓다. 더 하나,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빈 마음이 너무 좋다는 거다. 텅 빈 마음과 하늘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순간이다. 빈잔 이라야 술을 담고 빈 가슴이래야 세상을 안을 수 있다. 그렇다. 빈 마음으로 담담히 나그네 길을 가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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