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대의 ‘미츠와 포항농장’

김준철의 와인교실(25)

 

일제강점기 시대의 미츠와 포항농장

 

김준철 원장 (김준철와인스쿨)

 

일본 와인의 시작

 

김준철와인스쿨(원장)

일본은 명치유신(1868) 이후, 서구문물을 배우기 위해 많은 사람을 유럽으로 보낼 때 서구 선진 문물을 배워 오는 것도 중요했지만, 식사 때 와인을 마시면서 대화를 하는 세련된 문화에 반하여 와인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1877년 명치유신을 이끌었던 농상무성 관료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프랑스를 방문하고 포도묘목을 가지고 와서 전국에 배포하였고, 같은 해 일본의 포도산지 ‘야마나시(山梨)’에서는 ‘대일본야마나시포도주회사(大日本山梨葡萄酒會社)’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다카노 마사나리(高野正誠, 25세)’와 ‘츠치아 류켄(土屋龍憲, 19세) 두 젊은이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 포도재배와 와인양조를 배우게 하고, 이들이 1879년 귀국하면서 본격적인 일본와인의 역사가 시작된다. 필록세라의 침범과 습한 기후조건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와인용 포도재배를 꾸준히 연구하였다.

 

포항의 미츠와 농장

 

한편, 조선을 지배하면서도 조선 땅에 와인용 포도재배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마포와 안성에 와인용 포도밭을 조성하여 1921년부터 와인을 양조하였으며, 상당히 좋은 맛으로 양질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을 예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본격적인 서구식 와인생산은 민간 주도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포도 수입이 곤란하게 되자, 데라우치(寺內) 조선총독이 도쿄의 화장품 회사인 마루미야 상점(丸見屋商店, 1860-1975)의 ‘미츠와 젠베에(三輪善兵衛)’에게 조선 땅에 포도농장을 설립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고, 미츠와는 수원의 권업모범장(농촌진흥청 전신)에 적절한 재배지 선정을 의뢰하였고, 포항지역이 최적지로 선정되어 1917년 10월에 국유지를 불하받아 농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과거 영일군 동해면과 오천면 일부 지역으로 지금은 해병대교육훈련단과 포항비행장이 들어선 자리). 1918년 2월에 ‘미츠와 포항농장양조공장(ミツワ浦項農場釀造工場)’이라는 식료품공업을 등록하고 포도를 생산하였고, 점차 생산된 포도로 와인을 양조하기 시작한다. 당시 기록에는 “외국산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와인을 생산하여 조선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포항시청 자료에 의하면, 당시 “경북에서 포도 생산의 대표적인 곳은 연간 생산액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 고장의 ‘삼륜(三輪)포항농장’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츠와 농장의 규모

 

1926년 미츠와 농장면적은 150정보(45만 평, 150ha)으로 연간 와인생산량은 1,000섬(180,000ℓ)이었으며, 1934년에는 농장면적 200정보(60만 평, 200ha)에 연간 와인생산량은 800섬(144,000ℓ), 브랜디 100섬(18,000ℓ), 감미포도주 500섬(90,000ℓ)이었지만, 장차 포도수확 35만관(140만㎏), 감미포도주 1,000섬(180,000ℓ), 브랜디 500섬(90,000ℓ), 샴페인 및 셰리 100섬(18,000ℓ)을 예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제품으로 매출되고 있는 것은 식탁용 백생포도주, 감미백포도주, 감미적포도주, 브랜디 등이다. 농장장은 동경제국대학 농화학과 출신인 ‘나카노 류이치(中野隆一)’가 맡고, 직원 15명에 한국인 인부는 연간 연인원 32,000인에 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양 제일의 포도원으로서 그 이름이 외국까지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 비친 미츠와 포항농장

 

당시 조선신문(朝鮮新聞, 조선일보 아님) 1928년, 1929년 기록을 보면, ‘동양의 보르도, 조선 포항 미츠와농장 포도원’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총독부에서 검토하여 부지선정을 하였고, 제3기층의 지질에 배수가 잘되는 건조 지대이며, 포도의 당도 평균 20-24도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유럽종의 우수한 포도 묘목을 재식한 후 다년 간 노력으로 성공하였고, 이를 원료로 사용하여 와인 양조하였다. 이 포도원의 토양과 기후는 ‘동양의 보르도’라 할 만큼 우수하며, 조선의 경상북도 대구에서 동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조선 동해안 유일의 양항인 포항 시 외곽에 있다. 200여 정보의 면적의 구릉지에 강우량이 적어서 유럽 각국의 우수한 포도원과 동일한 환경에 속한다. 포도의 발육과 성장이 잘되는 우수한 포도원이다. 원료의 우수함에 더하여 양조설비는 근대 양조화학을 이용한 것이며, 양조기술에서는 본토의 포도주양조계의 권위자인 농학사 나카노 유이치(中野隆一)의 감독 하에 양조되고 있다.”라고 나와 있다.

또, 당시 오사카 아사히신문(1931. 6. 25.) 기사를 보면, 1930년 포도수확 5만 관(20만 ㎏)에 포도주(미츠와 포도주) 1,000석(180,000ℓ)과 브랜디 100석(18,000ℓ)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제품도 프랑스 고급품에 뒤지지 않았고, 향도 비교할 데가 없을 정도로 좋았는데, 여기에 강장제로 키니네(퀴닌)와 빈혈에 좋은 철을 첨가(規那鉄葡萄酒)하여 특수하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자양강장제가 들어있고, 천연의 좋은 맛과 향을 지닌 이 와인은 보르도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다고 극찬하면서, 조선의 경북이란 지역에서 일본 최고의 국산품이 나온다는 점이 다소 불편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포도는 야마나시부터”라는 말이 옛날부터 전해오지만, 오늘날에는 ‘조선의 경북’으로 고칠 필요가 있다며, 가와치(河内)의 야마토(大和) 포도도 유명하지만, 경북 포항에서는 양조를 목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포도나무로 조성한 대포도원으로 오늘날에는 반도의 모범적인 농장으로 유명하다고 전한다.

 

해방 후 미츠와 농장

 

미츠와 농장은 1939년에는 1,500석(27만 ℓ)까지 생산하였으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이 농장에 군용비행장을 건설하여 규모가 작아지기 시작했고, 해방 후에는 이재민 후생농장(罹災民厚生農場)이 되었다가, 1947년 미군정에 의해 이곳이 영일오천비행장으로 결정되어 비행장 면적이 넓혀지면서 포도밭 규모는 더욱 축소되었다.

 

그 후 자유당 민의원을 지낸 김판석(金判錫)의 소유로 되면서 많은 복구가 이루어졌고, 그는 회사 명칭을 ‘포항포도원’으로, ‘미츠와포도주’라는 명칭을 ‘포항삼륜포도주’로 바꾸고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 잘 나갈 때는 크라운레코드사를 통해 한국 최초 포도주 해외수출기념 광고용 선전음반까지 냈다. 이렇게 1950년대 신문광고에도 ‘동양 제일의 포도주’라는 문구가 나올 정도로 유명했고, 1960대 중반에는 서울의 전차에 광고까지 하면서 이 지방 명물로 각광을 받았으나, 기술력과 관리 부족으로 곤란을 겪은데 이어, 1966년에 제품에서 ‘포름알데히드’가 검출되었다고 문제가 되어, 검찰과 1970년 12월까지 진위여부로 장기간 재판을 하다가 사라지게 된다.

결론

 

미츠와 농장은 비록 일본인이 개척하였지만, 기후와 토양의 면밀한 조사 끝에 최적의 부지를 선정하였고, 일본에서 재배에 어려움을 겪은 유럽 포도를 포항의 나지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여 당도가 20-24도 정도 나왔다면, 우리나라도 유럽종 포도재배가 가능하다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나라는 부동산 가격과 인건비가 워낙 비싸기는 하지만, 연구와 노력을 거듭한다면 현재 일본 와인보다 더 뛰어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고 전망하는 것이 허황된 꿈은 아닐 것으로 본다.

 

필자:▴김준철와인스쿨(원장)▴한국와인협회(회장)▴고려대학교 농화학과, 동 대학원 발효화학전공(농학석사),▴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프레즈노캠퍼스 와인양조학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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