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면 생각나는 술 한 잔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면 생각나는 술 한 잔

 

박정근(문학박사, 작가, 시인, 황야문학주간)

 

 

필자는 남성고등학교 동창들과 중창단을 조직해서 노래를 즐기고 있다. 고등학교 교목의 이름을 따서 히말라야시다 중창단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오십대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십오년 넘게 함께 노래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저 우리만을 위한 잔치가 아니다. 친구들을 위해 노래로 봉사하는 일을 했다.

 

친구들의 자녀들이 결혼을 한창 하던 시기에는 머리가 허연 아버지 중창단들이 축가를 해주면 손님들이 감명을 깊게 받았다. 그들은 귀를 솔깃하게 열고 경청을 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아버지들이 노래를 하면 제대로 할까 걱정했는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많은 박수로 화답했다. 아마도 젊은 친구들이 노래하는 것보다 부친의 친구들이 중후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것이 다소 놀랍고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히말라야시다 중창단은 이제 거의 은퇴해서 백수이다. 하지만 현직보다 백수들이 이런저런 일로 일정들이 바쁘다. 오죽하면 우스갯소리로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한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한달에 두 번 정도 연습을 한다.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하면 반드시 점심을 함께 즐긴다.

온 힘을 다해 호흡하고 발성하면 금방 배가 출출하지 않을 수 없다. 중창단은 남을 위해 활동을 하려고 하지만 우선 우리들의 행복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연습 이후에는 좋은 음식과 술을 즐기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 비싼 음식은 아니지만 영양가가 좋은 음식과 술에 과감하게 투자한다.

친구들은 중창단이기에 술을 마시면 항상 노래가 뒤따른다. 장년인 노래꾼들이 에너지를 다 쏟으며 노래했으니 어찌 힘이 들지 않겠는가. 공연을 위한 노래와 즐기기 위한 노래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시큼한 능금 같은 청춘이 있었다. 우리들의 눈앞에 나팔바지에 장발을 한 채 통키 타를 매고 노래하던 시절이 항상 어른거린다.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오, 토요일 밤에….” 입을 열면 저절로 화음이 이루어지는 중창단은 술과 노래로 인생을 즐기는 낭만주의자들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점심을 먹고 술집을 찾아 가는데 중창단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곳이 있다. 종로3가에는 장년 이상들만 출입하는 지하 카페겸 술집이다. 여자 사장님은 왁자지껄하며 들어서는 우리를 쌍수를 들어 반갑게 맞아드린다.

평일날 오후라 다른 손님들은 별로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이십대에 부르던 포크송을 화음을 넣어 마음껏 부른다. 당연히 생맥주를 주문하고 시원하게 들이킨다.

 

점심식사를 하며 마신 술기운에 생맥주의 취기가 마치 여름날 분수처럼 솟아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제 디오니소스적인 축제를 벌여야 할 시간이다. 이 순간은 중창연습을 할 때 주어지는 음악적 제약도 없어진다. 각자 나름대로 낭만적인 포즈를 취하면서 멋들어지게 노래하도록 허용된다.

현대인들은 동물적 존재로서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탈자아적 축제를 즐길 시간과 공간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젊은이들 틈에 끼어서 춤추고 노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노장년층도 나름의 축제를 스스로 만들어서 즐길 필요가 있다.

 

중창단 단장은 젊은 시절부터 밴드를 운영하던 작곡가이자 노래꾼이다. 오히려 우리 세대보다 선배인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이 주축인 튜인폴리오, 세시봉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른다.

필자는 대학시절에 이장희, 양희은의 노래를 좋아했다. 기타를 걸머지고 친구들의 싱얼 롱을 이끌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시절에는 팝페스티벌에 나가서 트로피까지 거머쥐었으니 얼마나 팝송에 매료되었던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성악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지만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추억은 잊을 수 없는 젊은 시절의 증표로 남아있다.

 

필자가 생각해보면 사람은 삶의 행복을 위해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해야 한다. 현대생활은 공동체보다 개체의 독립적인 삶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개체가 무능하거나 비사회적이면 결코 따뜻하게 포용하지 못한다. 거대한 톱니바퀴 조직을 갖추고 있는 사회는 개체의 효용성이 수준 이하로 평가되면 폐기처분하고 유용한 톱니로 교체해버린다. 버려진 존재는 사회복지라는 명목으로 요양원 같은 곳에 보내진다. 결국 그는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잊혀지고 만다.

 

우리는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라는 요람을 회복해야 한다, 공동체는 결코 하드웨어적 시설이 아니다. 모든 개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이웃과 친구를 자신처럼 걱정하고 보살피려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노래와 술은 현대인이 결핍하고 있는 공동체 의식을 고양시키는 좋은 영양제이다. 중창단의 하모니처럼 혼자 부르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노래하고 마시며 즐기는 분위기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노래를 부르거나 술을 마시면서 어느 순간 옆에 있는 친구가 나의 배우자요 분신처럼 느껴질 때 바로 그 순간이 전체가 하나가 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성은 매 순간 자신이 독립적으로 정상적인 존재인가를 감시한다. 자신의 아성이 안전한가 체크하는 의식이 발동한다. 또한 각자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는가 계산하고 자신의 일이 통장의 금액을 얼마나 증가시켰는지 안달을 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나 하나만이 아닌 조국과 민족과 인류를 생각하는 사랑을 만들어가는 술과 같은 대아적 요소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디오니스소적 영양분을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 자! 이제 가을처럼 농익은 술 한 잔 즐길 수 있는 디오니스소의 자식들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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