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술과 안주 그리고 잔
좋은 안주거리가 생기면 술이 생각나고, 좋은 술이 생기면 안주거리가 생각난다.
우리의 음주는 술과 안주가 찰떡궁합일 때 더욱 빛을 발휘한다.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은 지짐이 부쳐놓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한 것도 우리몸속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DNA가 있어서는 아닐까.
요즘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반주(飯酒)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얼큰한 찌개나 해장국, 순댓국 같은 탕종류의 식사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소주나 막걸리로 반주를 한다. 비빔밥처럼 담백한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하는 사람들이 드문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만큼 우리의 음주문화는 안주와 불가분의 관계가 성립된다.
그렇지만 이른바 깡소주를 마시는 사람도 없지 않다.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시절에 구멍가게나 대폿집에서는 잔술을 팔았다. 안주 시켜 놓고 걸판지게 술을 마실 수 없는 사람들은 대포 한 잔으로 만족해야 했다. 안주라야 왕 소금 몇 알 털어 넣거나 인심 좋은 집에서 내놓은 신 김치라도 한 점 씹는 것으로 안주를 대신했다. 대포 한잔은 대게 됫병에 담긴 막소주(30도)를 맥주잔에 따른 것이나 아니면 큰 양재기로 떠 주는 막걸리였다.
보통 장마당에서 신명나게 부르는 장타령 가운데 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대포잔이나 먹었니 얼간하게도 잘 하네, 소주병이나 먹었나 비틀비틀 잘 한다”
<원주 장타령>에서 ‘대포잔’이 나오는 것으로 봐선 ‘대포(큰 술잔)’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음주형태가 아닐까 생각된다.
옛날 육조(六曹) 삼관(三館)을 비롯한 각 관아나 향촌에서 한 말들이 큰 대폿잔에 술을 담아 차례로 돌려 마시는 공음례(共飮禮)가 의식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사헌부(司憲府)의 대포는 아란배(鵝卵杯), 교서관(校書館)의 대포는 홍도배(紅桃杯), 예문관(藝文館)의 대포는 벽송배(碧松杯)라고 대폿잔에 이름까지 붙였다니 선인들의 풍류가 멋지다. 그리하여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사이를 대포지교(大匏之交)라 불렀다.
요즘 일부 연예인들은 다이어트를 위해 안주 없이 술만 마신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안주를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술살’이 찔까봐 인주를 멀리 한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든다.
좋은 술 그리고 안주가 있는 주안상이 있다면 술을 따르는 잔은 어떤 잔으로 해야 할까.
흔히들 막걸리는 약간은 쭈그러진 주전자에 양은잔, 소주는 소주잔, 그리고 맥주는 맥주잔이 제격이라 여긴다. 와인은 와인 잔에 따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다.
따라서 술잔은 술의 마지막 포장이다. 술이란 상품가치를 품격 있게 높이려면 잔부터 바꿔야 한다. 그래야 제 맛이 난다. 특히나 우리의 전통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양재기 잔부터 치워버려야 한다.
가령 와인을 종이컵으로 마셔보라. 그 와인 맛이 제대로 나겠는가. 이는 종이컵에서 나는 특유의 종이 냄새가 술의 향기를 반감시키기 때문이다.
술은 밥과 달리 배곺아서 허겁지겁 먹어야 되는 음식이 아니다. 왕소금 몇 알로 안주를 대신 하던 시절도 아니다. 가령 막걸리를 와인 잔으로 마시면 분위기가 고급(?)스러워진다.
맥주나 와인 잔이 유리로 되어있는 것은 유리의 성질이 술의 맛과 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와인 잔의 윗부분이 오므려져 있는 것은 와인의 향을 간직하기 위함인데 향기 나는 전통주를 와인잔으로 마시면 그 향까지 전부 느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의 막걸리 잔이나 소주잔도 바꿀 때가 되었다.
우리의 전통주를 진정 아끼고 사랑한다면 잔의 고급화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