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이 술집에서 찾은 해방의 비법
박정근(문학박사, 황야문학 주간, 김수영 기념사업회 이사장, 소설가, 극작가, 시인)
허균은 술잔을 들어 올려 낡은 조선 유학의 뺨을 세게 후려친 풍운아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선비의 품격”을 운운하며 겉으로는 온갖 얌전을 떨고 뒤로는 첩을 두고 살았다. 하지만 허균은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본성이고, 예의범절은 성인이 만든 틀이니, 나는 하늘을 따를지언정 성인을 따르지 않겠다”고 대놓고 선언한 당대 최고의 ‘지성적 반항아’였다. 허균에게 술과 여성, 그리고 자유연애는 단순한 유흥이나 쾌락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세상을 깨부수는 가장 파괴적인 ‘해방의 무기’였다.
허균은 당대의 주류인 주자학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반항적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주자학자들이 인간의 욕망을 ‘악’으로 치부할 때, 허균은 남녀 간의 성적 욕망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성이라 주장했다. 그에게 술은 가식적인 이성의 고삐를 풀고, 인간을 가식 없는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촉매제일 뿐이었다. 즉, 술을 마심으로써 유교의 허구의 갑옷을 벗어 던지고 인간의 본능에 충실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허균이 성적 욕망을 무분별하게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기생 매창에게 보여준 문학적 교류는 남녀관계의 성적 대상을 넘어 ‘영혼의 동반자’로 승화시키는 순수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그녀와의 교유는 신분을 뛰어넘은 정신적 교유였기에 매우 특이하고 의미가 있다. 그녀와 나눈 평생 우정은 술과 문학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받았지만, 육체적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지성 대 지성으로 사귀는 순수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매창과의 문학적 교류는 기생을 천한 신분으로 여기지 않고 문학적 동반자로 승격시키는 파격적인 인간관이 숨어있다.
당대 사대부들에게 기생은 소모품이나 첩실 후보에 불과했지만, 허균에게는 계급과 성별을 초월해 ‘새로운 세상을 논할 수 있는 술친구로 생각했던 것이다.

허균은 그의 파격적 기행이 그의 신분을 위협하더라도 그의 혁명적 사회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주류 사회는 주자학적 신분제도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불교, 기생, 술 등은 그의 품위를 위협하는 금기 적 요소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회적 편견에 결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추구했다. 허균은 공직에 있으면서도 절에 가서 스님들과 술을 마시거나, 기생을 끼고 시를 읊어 여러 차례 탄핵받고 파직당했다. 그런 사회적 징계는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을 구속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회적 금기에 대해 저항하며 강한 개혁을 요구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조정은 파직으로 그의 자유주의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파직 후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 무슨 죄인가?”라며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곤 했다. 술자리는 그가 조정이라는 허위적인 정치판에 던지는 가장 강렬한 언론의 장이었던 셈이다. 주자학이 잘못된 학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그 학문의 이론이 완고한 사회적 규범이 되고 시민들의 자유를 통제하게 될 때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폭력적 도그마가 된다.
허균은 주자학이 만든 예법이 그의 본성을 악마화하는 허위적 잣대가 되는 것에 분노했다. 그가 추구하는 도교적 자연성을 죄악시하는 주자학의 예법은 조선사회의 시민들에게 엄청난 족쇄로 작용했다. 허균은 주자학이 죄악시하는 정욕은 세상을 유지하게 하는 자연적 본성이라고 주장하며 그걸 구속하는 예법에 대해 비판하고 나선다.
예법이란 성인이 만든 것이요,
정욕은 타고난 본성이라네.
성인의 예법은 내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은 차마 어기지 못하겠네.

조선사회에서 주자학이 만든 최악의 규범은 서얼들에 대한 소외와 배제였다. 허균은 조선사회에 대해 묻곤 했었다. 도대체 서자나 여성이 왜 사회에서 배제되는 잣대가 되어야 하는가. 여성과 서자는 사회 참여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특히 남녀 간 사랑의 결과로 태어난 서자들은 사회적 참여가 엄격하게 배제되었다. 정실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득권을 가진 양반들은 공공연히 첩실을 두고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위선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사회적 관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여성과 서얼에 대한 차별이 조선사회의 인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국가적 손실을 자초하고 말았다.
허균은 이러한 사회적 병폐에 대해 서얼들과 술을 마시며 개혁을 논했다. 사회적 관점에서 불만으로 가득한 서얼들과 어울려 시국을 논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볼온시 한다는 것을 허균이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칠서의 난으로 유명한 서얼 출신의 천재들인 이재영, 박엽 등과 밤새 술을 마시며 신분제의 모순을 분노하고 개혁을 토론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허균은 왜 그러한 반사회적 행위를 했을까. 아무래도 술과 개혁은 공존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술은 의식의 검열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신분제의 문제를 논의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허균은 술기운 속에서 계급의 벽이 무너질 때, 비로소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았으리라.
이 술자리에서의 담론들이 훗날 《홍길동전》의 율도국으로 결실을 본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서얼의 아픔을 고통스럽게 당해온 홍길동은 의적이란 이름으로 사회적 개혁을 꿈꾸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그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대신 율도국이란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 떠나고 만다. 허균 역시 술을 마시며 개혁을 꿈꾸다가 실패하고 참형을 당하는 비극을 연출할 뿐이다. 그에게 술은 신분제를 극복하고 평등한 대동세계를 꿈꾸게 하는 묘약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