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all news -팜므파탈과 옴므파탈의 치열한 전투-

-팜므파탈과 옴므파탈의 치열한 전투-

필자 남태우 교수

무골군자와 무치부인의 에로스적 암투(3)

-팜므파탈과 옴므파탈의 치열한 전투-

남태우(南台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풍류와 음주 칼럼니스트)

 

육담이 다루고 있는 성(性)은 본질적인 인간성 임에도 불구하고, 기성 사회가 이를 규제하고 금기시하고 있는데 대하여 이를 음양으로 파기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첫째가 성 그 자체를 쾌락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생식 외의 성을 무시한 전통 의식에 상반된다. 예컨대, 중이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욕심(음욕)이 움직였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인의 뒤를 쫒던 중은 “네 어찌 방귀를 뀌느냐?” 하고 여인을 꾸짖었다. 여인은 발끈하여 중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중이 재차 꾸짖었으나, 여인은 수그러들지 않고 대드는 것이었다. 중은 “마침 저기 부처님이 계시니, 우리 같이 가서 시비를 가리자.” 하였다. 여인도 그러자고 하여 함께 그리로 갔다. 중은 부도(浮屠) 앞의 으슥한 곳에 이르자 여인을 강압하여 극음(極淫/음란함을 다함)하였다. 함께 돌아오는 길에 여인은 중을 돌아 보고 말하였다. “스님, 방귀 한 번 더 뀔까요?” 중은 웃으며 갔다.(속어면순/ 女請再屁)

둘째, 성을 인생의 소중한 가치로 나타내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지상(至上)의 가치로 그렸다는 인상을 준다. 셋째, 성에 무지한 이를 일깨우는 내용의 이야기도 육담의 한 갈래로 있다. 이는 자칫 속된 표현이 될 수도 있는 성적 내용을 골계적(滑稽的)으로 재미있게 전달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성적 관심과 흥미를 갖도록 유도하는 계몽의 구실도 한다. 육담은 단순히 흥미만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성을 가르치는 정당한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전통적 조혼사회에서 남자에게 성을 깨우쳐 알게 하는 주요한 구실도 했다.

필자 남태우 교수

육담은 성에 관한, 있을 수 없는 허구의 이야기, 있었던 사실의 이야기, 있을 수 있는 가상의 이야기들을 포괄한다. 이들 이야기의 내용은 주로 남녀간의 성적 관계에 국한되며, 선악의 대립은 관심사가 아니며, 기지(機智)와 지략(智略)은 있어도, 성과 무관한 갈등이나 고민은 없다. 성적 계몽의 기능은 교육적, 교훈적이지 않는 한계에서 이루어진다. 육담은 성의 진실을 쾌락에 두고 있어, 주인공들이 도덕적 고민이나 윤리적 갈등 없이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하되 권선징악이 따르지 않는다.

육담 속의 인물에게서 보는 성에 대한 집착심, 과도한 반윤리적 성향은 성을 억누르고 금기시한 사회의 경직성에서 불가피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남녀간에 있어야 할, 자연스러운 애정의 부재, 그 당연한 결과로서 애정과 성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없었던 데서 오는 불만이 성적 욕망을 동물적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정상적으로 성적 욕구불만을 해소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혼외정사나 겁간(劫姦)과 같은 비정상적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시켰던 때문에 육담, 특히 조선시대의 문헌 육담에서는 그와 같은 세계가 곧잘 반영되고, 소재가 되었다.

문헌 육담은 중세적 모순의 산물이라 할 왜곡된 성의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나, 한편 성적 욕구불만을 중화하고 해소하는 배출구 구실을 해왔고, 또 하고 있다. 육담의 주인공들은 관습이나 윤리의 탈을 벗어 던진 ‘성적 인간상’이라는 차원에서 두루 평등한 인간들이다. 조선조에도 육담은 중인(中人)쯤(?) 되는 ‘입담꾼’들이 전승했으나, 오히려 양반네들이 더 즐겼다. 양반도 인간이기에 인간 본연의 행동에서는 동일할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서민 이상의 괴벽스럽고 추한 동물적, 변태적(?) 번식욕에 사로잡힌 행위들을 스스럼없이 했으리라?

육담의 내용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한민족 문화권에 일관적으로 통용되는 특징이 있다. 우선, 우리나라 육담은 성행위에 대한 묘사보다 남녀의 성기를 해학적으로 풍자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육담은 구술 방식으로 이뤄질 때 재미를 더한다. 육담의 구연 형태는 해서(楷書)‧반행(半行)‧행서(行書)‧초서(草書) 등으로 나뉜다. 해서(楷書)라 함은 점잖게 한다는 뜻이고, 반행(半行)으로 한다면 좀 난잡하게 한다는 것이며, 행서(行書), 초서(草書)로 한다는 것은 아주 난잡스러워 포복절도케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조상들은 육담의 구연을 글씨체(書藝)에 비유했으니‧‧, 그 재치가 사못 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사를 살펴보면 상대(上代)에 거슬러 올라갈수록 성에 대한 표현이 노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육담은 상황에 따라 점잖게도 하며, 잡스럽게도, 난하게도 하였다.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고(故) 이규태는 ‘야밤에 실바람이 실어다 주는 옷 벗기는 소리’는 해서(楷書)에 해당하고, ‘방앗간 아닌데 방아 찧는 소리, 샘이 아닌데 확 돌리는 소리’는 반행(半行)이요. ‘소낙비 소리 뚫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감창(甘唱/성적 절정에 내는 소리)소리’는 초서(草書)에 해당한다.”고 문인적 기질에 서예가의 기지를 더한 해학의 재치와 기지를 보였다. 이처럼 우리의 조상들은 육담의 구연을 글씨체(書藝)에 비유했으니…, 기막힌 지혜로운 문자적인 골계이다. 조선시대 애정 소설이나 풍자적인 글에서 성적 절정의 순간이나 정사 장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반행(半行)’ 수준의 은유로 쓰였다. 문학사를 살펴보면 상대에 거슬러 올라갈수록 성에 대한 표현이 노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전승된 육담을 포함한 이야기를 구비문학(口碑文學/口傳文學)이라 한다.

해서(楷書)는 모름지기 문인처럼 쓸 것이요, 초서는 모름지기 명장처럼 쓸 일이다. 행서는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놓인 것이니, 마치 뛰어난 지략과 따뜻한 인품으로 적국조차 감동시킨 인물 양숙자(羊叔子/西晉 시대의 명장 양호(羊祜, 221~278)의 字로, 그의 성을 따서 양숙자라고 흔히 불린다)가 허리띠를 느슨히 하고 갖옷을 가벼히 하는 것(緩帶輕裘) 같은 것이 바로 아름다운 점이 된다. 해서(楷書)는 문덕(文德)이 있는 사람과 같은 것이요, 초서(草書)는 명장(名將)과 같은 것이요, 행서(行書)는 해서와 초서 사이에 끼며, 양숙자(羊叔子)가, 완대(緩帶)와 경구(輕裘)를 입고 싸우는 것 같아, 바로 써야만 좋은 것이다라고 권유했다. 이러한 합은 <유몽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청대(淸代) 초기 장조(張潮)가 지은 청언소품집(淸言小品集) <유몽영(幽夢影/ 아련한 꿈속의 그림자)>에서 꽃구경 할 때는 아름다운 여인과 마주해야 하고, 달빛에 취할 때는 운치있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며, 눈 구경을 할 때는 고상한 사람과 나란히 해야 한다.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는 것은 아름다운 미인을 마주 대하는 것과 같고, 은은히 빛나는 달에 취하는 것은 시서화가(詩書畵歌)를 즐기는 선비를 마주하는것과 같고, 백설(白雪)에 반사되는 빛을 바라보는 것은 고상한 선비를 마주 대하는 것과 같다.

연박(淵博)한 벗을 대하는 것은, 이서(異書)를 읽는 것과 같고, 풍아(風雅/ 正詩)한 벗을 대하는 것은, 명인의 시문을 읽는 것과 같고, 근칙(謹飭/ 신중함)한 벗을 대하는 것은, 성현의 경전을 읽는 것과 같고, 골계(滑稽/해학)한 벗을 대하는 것은, 전기(傳奇) 소설을 열람하는 것과 같다. 해박한 벗과 함께 있는 것은 기이한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운치있는 벗과 마주함은 이름난 문인의 시문을 읽는 듯하며, 삼가고 신중한 벗을 대함은 성현의 경전을 읽는 것과 같고, 재치있는 벗과 같이 함은 전기소설을 읽는 것과 한 가지이다.

남녀간의 동침은 한 문장 내지 두 문장으로 간략하게 서술될 뿐, 행위 그 자체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성기에 대한 묘사 가운데서도 남성의 성기가 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남성우월주의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래의 사례를 살펴보자.

 

강원도 정선에‘조(鳥) 재(鳥嶺)’라는 높은 재가 있는데, 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선은 온통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어서 봄이 되면 산불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늦은 봄철 산불방지 때문에 지친 사또가 집에서 쉬고 있는데, 조재에서 산불이 번지자 하인 뛰어와 보고했다.“사또, 조재 불났습니다!”깜빡 졸다가 일어난 사또는‘조재’란 말을 순간적으로‘좆에’란 말로 알아듣고 얼른 자기 허리춤을 내려다보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자,“예끼, 이사람. 난 괜찮네”했다. 직원은 다시 또 “조재 큰불이 났습니다.”하고 다급하게 보고했다. 그러자 사또는 “내 것은 괜찮네. 혹시 자네 좆에 불난 거 아니야?”하며 역정을 냈다고 한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을 가진 조령(鳥嶺)은 주로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 사이의 고개인 문경새재를 의미하며, 새(鳥)를 닮았거나 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가 있다. 강원도 정선과 관련된 ‘조(鳥)’ 관련 지명으로는 정선 조동리(鳥洞里), 과거 정선 함백 지역에 ‘새골(鳥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주변 산의 형세가 봉황새가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는 형국(鳳巢抱卵)이라 하여 조동(鳥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기록이 있다. ‘새를 닮은 높은 재(조재)’는 문경새재(鳥嶺)의 유래와 유사하게, 봉황새 형상을 한 정선 조동리의 지명 유래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조동(鳥洞)의 본 이름은 ‘새골’로, 마을을 둘러싼 산의 형세가 마치 새가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는 형국(鳳巢抱卵形)인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외에도 남성의 성기를 ‘송이버섯, 송곳, 가죽침’ 등에 비유해 표현하는 육담이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살펴본 송강의 시조가 대표적인 사례다. 박문수, 봉이 김선달, 강감찬 등 널리 알려진 영웅들이 육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공통적인 특성이다. 이들은 민중들에게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영웅들이다. 영웅을 이처럼 음담화한 것은 이들의 번뜩이는 재치를 성을 통해 해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도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좀 더 서민 친화적인 영웅을 만들려는 의도도 있다. 아래 김삿갓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어느날 김삿갓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에 묵게 되었다. 여관 주인의 마누라에게 흑심을 품은 김삿갓은 황소를 풀어 여관을 어수선하게 만들어 놓고는 그 틈을 타 주인 마누라와 관계를 맺었다. 이 사실을 안 여관 주인은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여관의 모든 사람을 집결시켰다.“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 있던 사람은 누군가”라고 물으니, 모두들 다 나갔다고 대답했다. 여관 주인이“좋다. 몽땅 검사해야겠으니 바지를 벗으라!”고 고함을 쳤다. 기가 질린 사람들은 옷을 벗었다. 김삿갓도 마지못해 옷을 벗고 구석에 앉았는데 불빛 아래 깨주머니가 보였다. 그는 깨를 집어 물건에다 바르고 “내 좆은 깨좆인데!”하고 소리쳤다. 주인이 와서 보니 과연 희한한 물건이었다. 주인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했다.

 

여기에서 ‘깨좆’이라는 표현은 보통 크기가 아주 작다는 의미로 쓰이는 자학적인 유머 코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도둑놈은 본인은 아니다라는 의미다. ‘깨좆’은 한국의 전통적인 성 유머나 육담(肉談) 설화형 속담에서 단순한 욕설이나 비속어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주로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나 하찮은 대상을 비하하여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깨좆’은 주로 한국의 전통적인 육담(음담패설)이나 김삿갓 일화 등에서 등장하는 표현으로, 성(性)적인 허세나 남성의 권위를 비꼬거나 풍자하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다. ‘내 좆은 깨좆’이라는 식의 표현에서, 남성의 성적 능력이나 허세를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깨’에 비유하여 비웃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깨좆’은 남성의 성적 허세를 풍자하고 해학적으로 비꼬는 문학적/구비 문학적 표현이다.

저열한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진정성, 하지만 육담의 내용이 모두 허황됐다고 볼 수는 없다. 해학적 요소를 많이 가미해 진정성이 다소 떨어져 보이기도 하지만 일부 육담의 경우 오늘날 사람들이 봐도 호응할 수 있을 정도로 공감의 여지가 다분하다. 특히 성지식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던 그 시절의 관점에서 풀어냈기 때문에 표현이 다채롭기 그지없다. <삼국유사>의 선덕여왕 이야기를 보자.

 

어느 겨울날 영묘사 근처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많이 모여 여러날 계속 울자 신하가 괴상케 여겨 여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여왕은 장수 둘을 불러 잘 훈련된 병사 2천 명을 이끌고 궁성 서쪽에 있는 여근곡을 공격해 적병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여근곡을 탐문하니 실제로 백제 병사 5백 명이 숨어있어 모두 섬멸했다. 신하들이 여왕의 예지력이 감복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여쭸다. 그러자 여왕은 “옥문은 여근이니 여자의 음부요, 개구리는 병사의 형상이며,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니, 백제 병사들이 여근곡 속에 숨어있으므로 공격하면 이길 수 있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비록 결혼을 하지 못했지만, 음양의 이치와 남녀 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옥문이 여성의 자궁을 나타내는 것, 남자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들어가 일을 마치면 죽어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 등을 통해 여근곡에 숨어있는 백제 병사들을 치면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남녀 간의 성행위는 쾌락을 보장할 뿐 아니라 생명을 낳는 생식행위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성행위는 풍농, 다산 등을 기원하는 주술적 형태로 자리잡기도 했다. 풍농을 기원하는 굿에서 여장승과 숫장승이 첫날밤을 재연하는 것이나 우리나라 곳곳에 남근석 혹은 여근석이 발견되는 것은 이와 연관이 깊다. 당연히 이와 연관된 육담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떤 과부댁에 머슴을 구한다는 소문이 났다. 일깨나 한다는 남정네들이 앞다퉈 갔으나 새경이 너무 비싸 모두 퇴짜를 맞았다. 한 건장한 총각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새경을 한 푼도 받지 않을테니 저녁마다 초 두 자루씩만 달라”고 했다. 과부는 이에 동의하고 머슴을 고용했다. 그런데 이 총각이 밤마다 불을 환히 밝히는 것이었다. 궁금함을 느낀 과부가 문틈으로 엿보니 머슴이 벌거벗고 누운 채로 성기를 번쩍 세우고 있었다. 놀란 과부가 얼른 자기방으로 돌아왔으나, 눈앞에 머슴의 성기가 아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문틈을 엿보다 사흘만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문을 활짝 열었다. 머슴이“쥔 아지매, 왜 이러시오. 내가 지금 농사 잘되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리고 있는데”하자 과부가“아이고 총각, 농사고 뭐고 나부터 좀 살려달라”며 냅다 안겼다.

 

……… ………

 

어떤 시골 마을에 머슴살이 하는 총각이 소죽통을 빌리러 울타리 너머 이웃 과부의 집에 갔는데, 그때 과부는 엷은 홑치마를 입고 창가 봉당에 누워 자고 있었다. 흰 살결의 허벅지가 반쯤 드러난 것을 본 총각은 음욕을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양물(陽物)을 맹렬히 들이밀자, 과부가 놀라 눈을 떠보니 이웃집 총각머슴이 아닌가. 과부는 노하여,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총각이,“내가 소죽통을 빌리러 왔다가 우연히 이런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만 그칠까요?”하고 말하니, 과부는 두 손으로 총각의 허리를 끌어 안으면서,“네가 마음대로 겁탈을 하고, 또 네 마음대로 그치려 하느냐!”하고 드디어 극음(極淫)에 이른 후에야 총각을 보내었다. 이튿날 저녁에 과부가 울타리 밖에서 다시 총각머슴을 만나자,“총각! 오늘은 왜 소죽통을 빌리러 오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총각은 과부의 뜻을 알아내고 밤이 깊어지자 또 가서 어제처럼 즐겼다 한다.

 

 

고된 하루를 달래주는 민중의 활력소, 육담은 삶의 활력소, 민초의 삶의 애환을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사회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불만 요소를 다른 곳에 배출함으로써 살아갈 여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배출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옆집 남녀를 육담의 소재로 삼을 수도 있고, 탐학한 양반, 관리 집단의 성을 왜곡해 퍼뜨리기도 한다. 양반, 관리를 곯려주는 육담에서는 여자가 자주 등장한다. 앞서 제시한 정철이 대표적 사례다. 자신을 욕보이려는 선비를 곯려주는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아래의 육담도 이와 관련이 깊다.

 

어떤 선비가 새벽에 한 마을을 지나다 보니 한 여자가 쌀을 씻고 있었다. 쌀을 다 씻은 여자는 그 물을 큰길에다 확 부어버렸다. 이를 본 선비가 “에이 그년, 새벽물 싸기도 많이 싼다”고 수작을 걸었다. 그러자 여자가 “새벽에 옆 선비가 하나되어 나간다”하고 맏받아쳤다. 그 뒤부터 그 선비는 여자에게 농을 걸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육담은 오늘날의 음담패설과 분명 다르다. 은폐된 성에 대한 비정상적 표출인 음담패설과 달리 육담은 남의 성생활을 침해할 의사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 야한 얘기는 웃기 위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담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도 없으며 이득을 얻는 자도 없다. 오히려 유교문화가 지배했던 그 당시 금기시되는 성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듣는 사람에게 해방감과 쾌감을 준다. 때묻지 않은 순수함, 악의없는 장난이기 때문에 육담이 매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민속학자 임석재 교수는, 다음과 같이 한국 육담의 기능을 언급하고 있다. ‘육담에는 성에 관한 무지나 오해로 인하여 기이한 행위, 오류, 실수 등이 일어나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 있는데, 이러한 육담은 청소년에게 성적 지식을 알려주는 역활을 한다. 또한 육담에는 이성을 유혹하고 성욕을 자극하며 성감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계략, 책략, 기지 등을 구사하는 것도 있는데, 이러한 것은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게 해주기도 한다.’고 했다. 육담의 기능은 웃음이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웃음을 의도적 웃음인 ‘풍자’와 순수한 웃음인 ‘유머/로 나누었고 김열규(金烈圭, 1932~2013) 교수는 유머를 다시 ‘흰 웃음(White Laughter)’과 ‘검은 웃음(Black Laughter)’으로 나누고 육담을 검은 웃음이라고 하였다. 육담이 비록 검은 웃음이라고 해도 ’자신의 육정을 표현하거나 남의 육정을 자극하거나 도발하는 ‘외설이 아니라 남을 웃기는 순수한 소화이다. ‘흰 웃음’은 순수함, 기쁨, 환대, 긍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맑은 웃음을 의미하며, ‘검은 웃음’은 풍자, 해학, 조롱, 혹은 억눌린 감정이나 비판적인 의도를 담은 소극적(笑劇的) 웃음을 뜻한다. 흰 웃음이 내면의 밝음을 드러낸다면, 검은 웃음은 숨겨진 속내나 상황에 대한 비아냥을 내포한다. 웃음의 색깔은 상황과 내면의 심리에 따라 다르게 표출되며, 때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생리학적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