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中原)의 물과 불의 노래를 거두면서


김상돈의 酒馬看山(19)

 

중원(中原)의 물과 불의 노래를 거두면서

 

 

주마간산(酒馬看山)은 변형된 말이다. 술이라는 소재(素材)를 좇아 만든 조어(造語)다. 그동안 달리는 말(走馬)이 아니라 취한 말(酒馬)이 산을 보듯이 그렇게 이어왔다. 달리는 말도 산을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술 취한 말이니 보는 것이 오죽 하겠는가? 그저 시늉만 냈을 뿐이다.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일천한 지식(知識)으로 코끼리 발톱만 건드리는 격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와 거기서 이어져온 오랜 역사(歷史)는 만만치 않은 벽이다. 그 속에서 명멸(明滅)해온 삶들은 무량(無量)의 변수(變數)다. 헤아릴 수도 없고 가늠할 수조차 없다. 여기에 물과 불의 조화(調和)를 더하니 사람의 한계(限界)를 뛰어 넘는다. 주마간산(酒馬看山)이란 단어도 가져다 붙이기 어려울 듯하다. 평생을 두고 풀어내도 다함이 없을 것이다. 이를 불과 이십 회(回)도 안 되는 분량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필자(筆者)의 지식이 부족한 탓이다. 식견(識見)과 지혜(智慧)가 경지(境地)에 이르지 못한 때문이다. 그저 취한 말(馬)에 애꿎은 책임을 떠넘긴다. 게다가 코딱지 같은 글을 이어오기에도 벅찼던 점을 함께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 마디의 매듭을 지으려 한다. 띄엄띄엄 가다보니 어느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이다. 제대로 살피지도 못한 채 마디를 만들려니, 중요한 인물을 빠트린 부분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중국 위(魏)와 진(晉)의 교체기(3세기경)에 죽림으로 들어가 세속(世俗)과 교제를 끊고 술잔을 나누며 청담(淸談)에 열중했다고 하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이 그 대표적 예다. 완적(阮籍), 산도(山濤), 혜강(嵇康), 향수(向秀), 유영(劉伶), 원함(院咸), 왕융(王戎) 등 7명의 현자(賢者)는 물의 노래에서도 비조(鼻祖)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당시 어지러운 세속을 벗어나 술과 함께 은거하며, 그렇게 자연과 어울린다. 유영(劉伶)이 완적(阮籍)을 대인(大人)이라 부르며 읊은「주덕송」(酒德頌) 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천지의 시작이 하루아침이고 만년은 순간이네. 해와 달은 문과 창이요 광활한 천지는 집 안뜰이네. 길을 가도 자취가 없고, 일정한 거처도 없다네. 하늘을 장막으로, 땅을 자리삼아 마음 가는 대로 산다네. 머무를 때는 술잔을 잡고, 움직일 때엔 술통과 술병을 들고, 오직 술 마시는 데만 힘을 쓰니 어찌 그 나머지 일을 알기나 하겠는가(以天地爲一朝 萬期爲須臾 日月爲扃牖 八荒爲庭衢 行無轍跡 居無室廬 幕天席地 縱意所如 止則操巵執觚 動則挈榼提壺 唯酒是務 焉知其餘).

당송(唐宋) 팔대가의 한명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도 아쉬움의 대상이다. 스스로 취옹(醉翁)이라 부를 정도로 술을 즐겨했다. 그는「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취옹의 뜻이 술을 마시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를 즐기려는데 있네”(醉翁之意 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라며 넌지시 술을 즐기는 의미를 덧댄다. 이외에도 당(唐)의 수묵화가 왕묵(王墨), 청(淸)의 소설가로「홍루몽」(紅樓夢)을 쓴 조설근(曹雪芹), 명 황족의 후손으로 개성주의 승려화가로 유명한 팔대산인(八大山人) 주탑(朱耷) 등도 술과 더불어 예혼(藝魂)을 불사른 이들이다. 술로 인해 나라를 기울게 만들거나 신세를 망친 이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널브러져 있다.

그 가운데 수많은 인물들의 물과 불의 노래가 필자(筆者)의 짧은 식견으로 물속에 가라앉고 불길에 타버린 셈이다. 중국 대륙에서 술을 즐겨하며 술과 함께한 이름 모를 이들의 빛과 그림자는 지혜로운 이의 붓을 통해 다시금 드러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술은 물과 불로 이뤄져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불타는 물」이라고 정의한다. 동양에서는 천록(天祿)이나 망우물(忘憂物), 소수추(掃愁湫, 근심을 쓸어버리는 빗자루), 혹은 미혼탕(迷魂湯, 혼을 미혹시키는 탕)이라 불리기도 한다. 물과 불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술의 세계는 그야말로 변화무쌍 그 자체다. 술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세상사가 대체로 선악(善惡)의 양면(兩面)이 있듯이 술도 그러하다. 백약(百藥)이 될 수도 있고 백독(百毒)이 되기도 한다. 술 속의 불을 물로 누르고 아름답게 승화시킨 이들의 얘기가 물의 노래다. 반대로 불이 물을 태우고 스스로를 망치게 한 이야기가 불의 노래다. 졸고(拙稿)는 술에서도 중용(中庸)의 도(道)를 살려 이로움을 취하고 내면(內面)의 무한한 잠재력(潛在力)을 끌어올리는 데 미력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비롯된 것이다.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술의 실체(實體)를 정확하게 바라보기를 내심 간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 중원(中原)의 물과 불의 노래는 기대와 달리 그야말로 주마간산(酒馬看山) 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다시금 이어지는 물과 불의 노래는 한반도로 넘어온다.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모습도 이질적이지 않거니와 여기서 살아가는 삶의 양태(樣態)도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 남의 땅 다른 민족의 노래가 아닌 5천년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에 체화(體化)된 노래로 이어질 것이다. 산처럼 켜켜이 쌓인 우리의 물의 노래와 불의 노래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상돈 : 물과 불을 넘나들면서 명정(酩酊) 40년을 살았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마치고 나서 신문사 정치부 기자와 국회 입법보좌관, 정당 부대변인, 공기업 이사, 대학교수 등을 두루 거쳤다. 이후 한국 다문화센터 등 여러 사회봉사 단체 활동을 병행하면서 4.19혁명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는 모임,『사단법인 4월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현재는『KAIMA』전무이사로 있다

 

출처 : 김은호, ‘죽림칠현도’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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