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의 에세이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분자양조
덕진동 이무기
1997년 이었던 것 같다. 스물넷, 그해 겨울. 친구들과 술 한 잔 불콰하게 걸치고 자취방으로 가는 새벽이었다. 덕진연못 물을 뺐는데 친구가 메기 잡으러 들어가자고 해서 연못에 들어갔다. 덕진연못은 덕진공원에 있는데 수심이 그렇게 깊지는 않았다. 겨울이면 한 번씩 물을 빼서 연못 청소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연못을 가로질러 건너편까지 가야겠다는 결심으로 난 연못 깊숙이 들어갔다. 한참 연못을 헤쳐 가는데 경찰이 출동을 했다. ‘살았나 죽었나’ 무전이 터졌지만 기어이 건너편까지 도달했다. 이튿날 아침 햇볕에 드러난 연못뻘은 내가 박박 기어간 탓에 마치 이무기 한 마리가 진흙을 헤치고 승천을 한 것 같았다.
얼마동안 난 덕진동 이무기로 불렸다.
2017년 4월 어느 날 덕진공원을 다시 걸었다. 햇살은 따스했고 많은 사람들이 봄나들이를 나왔다. 특히 벚나무는 1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 사람은 꽃 같은 나이 20대가 한 번이지만. 그 꽃그늘 아래서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봄날의 내 스무 살은 잉어가 헤엄치는 덕진공원 어디쯤에 남아 있을까?
돌이켜보면 연어처럼 모천에서 태어나 먼 바다로 나아갔지만 이제 다시 모천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이제 이무기처럼 승천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화사한 꽃그늘 아래 해마다 서 있고 싶다.
내 술이 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기를.
지는 꽃조차 눈부신 봄날.
분자양조학
봄날을 책 읽으며 지냈다.
그 가운데 이강민 선생님이 쓰신 ‘나는 부엌에서 과학의 모든 것을 배웠다’라는 책이 참으로 인상 깊다.
이 책의 주요내용인 분자요리를 보며 난 우리의 양조업에 이것이 적극 도입되어야 한다고 본다. 전통주에 대한 기존 관념을 해체해 보고 그를 통한 재창조가 참으로 필요한 시기다. 기존 우리 전통주의 바탕인 고문헌도 당연히 근거해야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전통주의 토양이 너무 얇고 무엇보다도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분자요리에서 사용되는 물리학 혹은 화학은 실제로 와인과 맥주에서 이미 많이 활용되고 있다.
가령 맥주에서 뜨거운 열은 보리를 식혜로 만들고 식혜의 당분을 효모가 알코올로 바꾼다. 열은 물리학에서 탐구하는 영역인데 열은 대류와 복사 그리고 전도를 통해 전달된다.
우리의 막걸리는 전도 혹은 대류 열이나 기화열을 사용하여 곡물을 익힌다. 곡물을 익히는 방식은 크게 고두밥, 떡, 죽, 생쌀발효 등의 방식이 있다. 하지만 섭씨 100도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풍미가 부족하다.
이에 비해 맥주는 오븐 등을 통해 200도~300도의 온도에서 맥아를 구워 풍미가 깊고 다양성하다. 여기에는 고온에서 일어나는 마이야르반응 등의 화학이 숨어 있다.
증류기의 경우 동고리는 전래의 토고리에 비해 전도율이 높아 전통주 특유의 냇내를 줄일 수 있다. 화독(火毒)내는 그 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약점이기도 하다.
또한 감압증류기는 증류기 안의 온도를 감해서 끓는점을 낮춘다. 그래서 술덧이 바닥에 눌어붙어 화독내가 올라오는 것을 사전에 방지한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감압증류기는 저온 및 저기압 요리법인 수비드 방식과 유사하다. 이는 맥주에서도 약 10도 가량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키는 라거맥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수비드 요리가 풍미가 약하지만 담백한 것처럼 감압 증류주는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라거맥주 또한 청량감이 좋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맥주의 헤드는 분자요리에서 이야기하는 거품요리이며 탄산은 당분이 변하여 반절은 알코올이 되고 반절은 탄산이 된다. 맥주의 거품은 맥주의 완결성을 높여주며 견결하고 지속적인 거품은 소비자들의 만족도를 높인다.
그래서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은 맥주의 안정적인 거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과 고심을 한다.
그런데 우리의 막걸리는 맥주처럼 탄산이 똑같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탄산이 막걸리를 장식하는 혹은 풍부하게 만드는 좋은 재료라는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서울탁주에 탄산기가 들어가기 시작했고 최근에 농촌진흥청에서 거품막걸리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막걸리도 탄산이 중요한 일을 할 것으로 보인다.
가향재로 쓰이는 꽃이나 식물약재들의 추출과 그에 따른 질감이나 향도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리 술의 근간인 쌀과 누룩에 대해 심도 있는 과학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술은 농업이다. 농업을 떼어 논 술은 아무 매력이 없으며, 지역을 여행할 때 농업이 깃든 술을 만나는 일은 행복하다.
우리 술이 과학의 세례를 입고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또한 지역의 농산물들이 그 안에서 더욱 풍성해지길.
◈ 글쓴이 유 상 우는
전라북도 막걸리 해설사 1호. 혹은 전라북도 酒당의 도당 위원장 쯤 된다. 한옥마을 인근의 동문거리에서 양조장과 술집(시)을 겸업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전북의 막걸리 발전을 위해 막걸리해설사를 양성하려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