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사의 술 이야기③
내일이면 집 지으리
사실, 처음 원주로 발령 받았을 땐 이런저런 계획이 많았습니다.
본부 이전으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직장생활 34년만의 첫 지방 근무였기 때문이지요. 물론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걱정보다는 설렘이 앞섰습니다.
‘자유부인(?)’이 되면 무엇부터 할까 목록도 작성했어요.
그렇게, 살림에 묶여 있던 퇴근 후 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쓰리라는 각오와 함께 시작한 원주 생활은 정말 홀가분하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야심차게 세웠던 계획들 – 그간 읽지 못한 책들 읽어 치우기, 찍기만 하고 하드에 저장한 채 묵히는 중인 사진 정리하기, 걷기든 요가든 운동하기 등등은
하루하루 실천이 미뤄졌습니다.
퇴근 후 사택에 돌아오면 저녁거리나 청소․빨래 걱정 없이 과일과 즉석식품으로 허기를 때우고, 침대에 누워 딩굴거리며 티비를 보는 것이 너~무 편하고 행복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문득문득 아주 약간의 가책이 생기면 ‘내일부터….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하며 펴보지도 않은 책들과, 사진들과, 늘어가는 몸무게를 외면해 왔습니다.
이 못돼먹은 ‘내일’이란 병….
인도의 대설산에는…. 한고조(寒苦鳥)라는 전설의 새가 있대요.
한고조는 둥지를 틀지 않고 사는데, 눈보라 휘몰아치는 히말라야에 밤이 오면 암컷은 추워 죽겠다고 울고, 수컷은 미안하다고…. 내일은 집을 꼭 짓겠다고 추위에 떨며 울부짖는답니다.
그러나 아침이 오고 따스한 햇살이 퍼지면 한고조는 그만 지난 밤 사지가 찢어져 나갈 듯 하던 추위의 고통을 다 잊은 채 ‘무상한 이 몸, 집은 지어 무엇하리’ 하고 즐겁게 놀아 버린다지요.
그러다 다시 대지를 얼리는 추운 밤이 찾아오면 한고조는 그때서야 자신의 게으름을 원망하고 자책하며 구슬프게 웁니다.
한고조가 추위에 떨며 우는 소리가 ‘내일이면 집 지으리’라는 현지 말과 너무나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 울부짖음이 얼마나 처절하고 가여운지 누구나 그 소리를 들으면 눈물짓게 된답니다.
저는 가끔, 제가 바로 전설의 한고조를 까마득히 먼 조상으로 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만큼 무슨 일이든 미루는 데 재주 비상합니다.
그렇게 자꾸 미루기만 하는 것이 결국은 제살 깎아 먹기라는 걸 모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자꾸 미루기만 하다간 결국 한고조처럼 후회로 울부짖게 되리란 것조차 잘 알면서 말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1년이 훌쩍 지나버렸고, 새해가 시작된 지도 두 달이 되어 가는데 저는 여전히 실천 못 한 계획들을 미루고 있는 중입니다.
이 원고조차 다음 달로 미뤘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저를 다잡는 의미에서 오밤중에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막걸리 생각이 솔솔 저를 유혹합니다. 결국 냉장고를 뒤져 묵은 갓김치와 고추장아찌를 찾아내고 딱 한 잔 남은 막걸리를 가져와 버리고 말았네요.
다른 건 다 잘도 미루면서 어찌 계획에도 없던 밤술은 이렇게 지체 없이 실행에 옮기는 걸까요???
아! 한 잔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김경녀 <도로교통공단 방송관리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