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술잔을 돌리지 않으면 술은 적게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술맛이 없다. 주거니 받거니 해야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고 정이 쌓이며 술맛도 나는 법인데, 자기 잔에만 술 따라 마시면 맨숭맨숭해져 재미가 없다. 술 마시는 행위 자체가 약간은 취하자고 마시는 것이지 배고파서 밥 대신 마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최근 들어 술잔을 돌리면 약간은 미개인 취급을 당한다. 마치 혐오물건이라도 주는 양 거절한다. 그동안 정부나 잘 나간다는 전문가들이 술잔을 돌리면 당장 몹쓸 병에라도 걸리는 양 호들갑을 떤 탓일 것이다.
어느 전문가라는 사람은 술잔 돌리기의 폐해에 대해 “위궤양과 위암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라는 균이 있다. 우리나라 성인 가운데 60~80%에서 발견되는 이 균은 강력한 항생제로 박멸해도 유독 우리나라에서 재(再)감염율이 높다. 이유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찌개나 국에 침이 묻은 숟가락을 섞는 우리의 음식문화와 더불어 술잔 돌리기라는 독특한 음주습관도 분명 한 몫을 차지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뿐만 아니라, B형 간염도 술잔 돌리기 때문이라고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B형 감염은 침(타액) 등을 통한 감염은 거의 없고 보유자와의 성 접촉으로 감염되거나 보유자의 혈액을 수혈한 경우, 보유자와 면도기?칫솔 등을 같이 쓰는 경우, 어머니가 자녀에게 수직 감염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술잔 돌리기 등을 통해 감염될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다.지난해에는 ‘신종플루’ 때문에 관계당국인 보건복지부가 음주 시 술잔 돌리기 자제를 당부하고 나서 많은 주당들이 술잔 돌리는 것을 멈춰야 했다. 또 관광이 활성화되면서 외국을 자주 여행한 사람들이 “일본이나 중국 등에는 술잔 돌리는 음주문화가 없으니 우리도 그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바람 잡은 것도 한 몫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술잔 돌리기 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음식문화가 다르듯이 음주문화도 그 나라의 고유문화다.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까지 우리식으로 술잔을 돌리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술을 마실 때에는 우리식으로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우리는 대대로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酬酌)문화가 내려오고 있다. 당신도 내 술잔을 받아보시오” 하며 술잔을 건네는 것은 우리 고유의 음주문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음주문화에 맞게 행동하고, 우리나라에 왔으면 우리식으로 하는 것이 주권국가 국민으로서 할 수 있는 행동문화가 아닌가.
잔을 돌려가며 술 마시는 것은 수작문화, 서양사람들처럼 술잔에 자기가 마시고 싶은 만큼 따라서 마시는 것은 자작(自酌)문화, 중국이나 러시아, 동구권 사람들처럼 잔을 맞대고 건배하며 마시는 것은 대작(對酌)문화라고 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잔을 주고받는 수작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조선조까지 관청 등에서 소속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큰 잔(말들이)에 술을 부어 돌려가며 마셨다 하니, 우리의 전통적인 정(情)문화라 할 수 있다.
음식을 권하는 인심이 매우 후한 것처럼 술 인심도 후한 것이 우리네 정문화다. 술잔 돌리기가 비위생적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인생의 출발부터 시작되는 술잔 돌리기 때문은 아닐까. 결혼식(물론 전통혼례) 때 하늘과 땅에 두 사람의 혼인을 고(告)하고 배우자에게도 신의를 맹세하는 ‘서배우례’(誓配遇禮?일생토록 사랑할 것을 배우자에게 서약하는 의식)를 한 후, 두 사람은 각자 술을 따라 반쯤 마시고 술잔을 바꿔 잔을 비운다. 서로에게 혼인의 의미를 새기고 평생 반려자로서의 예의와 절개 등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때의 술을 ‘합환주(合歡酒)’라고 한다. 인생의 첫출발을 합환주로 시작한 우리의 음주문화를 하루아침에 없앨 순 없지 않은가.
《예기(禮記)》에는 ‘술로 예를 이룬다(酒以成禮)’고 했다. 술잔을 돌리든 말든 과음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것이 연말을 맞아 주당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