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
우리 속담에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양잿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광목(廣木:표백되지 않은 면직물)이나 옥양목(玉洋木:표백한 면직물) 같은 면직물을 옷감으로 사용하던 시절 양잿물은 빨래할 때 필수품이었다.
양잿물은 수산화나트륨으로 독극물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세제(洗劑)가 나오기 전 세탁 할 때, 때가 잘 빠지게 하기 위해서는 양잿물을 넣고 삶아야 때가 잘 빠졌다.
그래서 어느 집이고 양잿물을 필수품으로 갖추고 있던 시절 어린아이들은 양잿물(고체)이 사탕인 줄 알고 어른들 몰래 먹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독극물도 공짜로 준다면 먹겠다는 속담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인간사 공짜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만 공짜를 좋아할까. 공짜를 좋아하는 나라에 대한 자료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전 해외 토픽으로 ‘공짜초밥 먹으려고… 대만서 135명 이름 바꿔’라는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대만에서 일본 대형 초밥 체인점인 ‘스시로’가 이름에 ‘연어(鮭魚:구이위)’라는 글자가 들어간 사람에게 음식을 무료로 주는 행사를 벌이자 130여명이 이름을 ‘연어’로 바꿨다고 빈과일보 등 대만 언론이 보도했다.
공짜로 식사를 제공 받은 사람들은 할인 행사가 끝나고 나자 다시 원래 이름으로 개명 신청을 했다. 대만은 개명 절차가 비교적 간단하고 한 사람이 평생 3번까지 이름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공짜 식사를 위해 이름까지 바꾸다니 대단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 자를 남긴다는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속담도 있는데 말이다.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는 말도 있고, 공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도 있다. 복권 당첨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복권 1등 당첨자들의 비참한 몰락 스토리는 전 세계에 널려 있다. 공짜의 대가다.
그래도 망할 때 망하더라도 복권에 한 번 당첨 돼 봤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지하철 잠실역 부근에 로또 1등 당첨자가 40여회나 나왔다는 복권판매점이 있다. 이 점포 앞에는 언제나 긴 줄이 서 있다. 서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복권을 사러 오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고 한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복권이 많이 팔린다니 공짜 심리로만 볼일은 아닌 가 싶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중단된 상태지만 마트의 시식 코너도 공짜의 대명사다. 이 시식 음식은 공짜지만 이 또한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다. 시식 코너 음식이 별거 아니라고 여기고 덥석 받아먹고 돌아서기가 민망할 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 주세요” 한다. 지렁이 미끼에 붕어가 물린 꼴이 되는 셈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먹어 본 술 가운데 가장 맛있는 술이 어떤 술이냐고 물으면 별별 술 이름이 다 나올 것 같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주부터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양주, 흔히 마시는 소주나 맥주가 제일 좋더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농 짓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좀 더 고상한 대답으론 좋은 술친구와 마시는 술이라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술 한 잔으로 죽의 장막이 무너지기도 한다. 1972년 냉전체제의 한 축을 무너뜨리는 역사적 현장에도 술이 등장했다. 아시아·태평양 평화 구상 등을 담은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식당에서는 중국 전통주 마오타이가 들어갔다. 저우언라이가 건배를 제의하자 닉슨은 건배 땐 입만 대라는 비서진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원샷을 했다. 이 건배주 한잔으로 죽의 장막이 걷히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술의 힘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보통의 주당들은 이런 경지까지 모른다. 그냥 술이 있으면 마신다. 할 일 없는 백수도 한잔하면 백만장자가 되고, 내일 삼수갑산에 갈망정 당장 마시는 순간만큼은 즐겁지 않은가.
해외여행이 붐을 이룰 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본 초보 여행객들은 항공사가 제공하는 식사도 거절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경험자가 공짜라고 하자 그 때서야 식사를 했고, 와인이나 맥주(장거리 여행시는 양주도 나온다)를 드시라 하자 손사래를 치며 안 마시겠다던 사람들이 공짜라는 말에 너도나도 추가로 술을 주문한다.
술내기 게임에서 이겨서 얻어먹는 공짜 술은 당당함이 있겠지만 갑·을 관계에서 갑질로 마시는 술은 언젠가 된통 걸려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같은 데서도 팁만 주면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다. 카지노에서 왜 공짜로 술을 제공하는 것일까. 술 취해서 돈 좀 잃어 달라는 것 아니겠는가.
내 돈 내지 않고도 진탕 마실 수 있는 회식 자리에서 공짜 술이라고 과음도 하고 주사도 부린다면 결과는 어떨까. 눈총 받은 상흔(傷痕)이 많이 남을 것이다.
공짜 술이 맛있다곤 하지만 진정한 공짜 술은 없다.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세상이 급변하는 때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자신에게 감동하게 하고 또 남을 감동하게 하며 마시는 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보게, 친구! 화사한 봄날일세. 진달래꽃 따다 화전 부쳐놓고 술독의 석탄주(惜呑酒)도 잘 익었다네. 먼 길 마다하지 말고 찾아오게나.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