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들면 자연히 禁酒令이 내려졌다

흉년들면 자연히 禁酒令이 내려졌다

 

 

우리나라 술의 원료는 쌀이나 보리 등이다. 그래서 술 만드는 것이 그 해의 식량 생산 형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점이 포도를 이용해서 와인을 만든 유럽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흉년이 들어 먹을 거리, 즉 쌀이나 보리가 없으면 원료가 없으므로 당연히 술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쌀이 남아돌아 정부가 쌀로 술을 빚으라고 채근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역사적으로 자연재해에 의한 기근, 거기에 따르는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이 대단했고 농민의 폭동이나 반란 등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사치생활이 문제시 됐고, 술의 제조를 금지하는 ‘금주령(禁酒令)’이 내려졌다.

고려조 1021년에 사찰에서의 술 제조를 금지한 적이 있다. 1338년에는 금주령이 대대적으로 내려졌다. 1392년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이씨 조선이 수립됐는데 사온(司醞)에서만 술을 만들 수 있게 했고, 일반인에rps 금주령이 내려졌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면서 부패한 고려왕조와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정책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정했는데, 정권을 잡자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만든 것이 금주령이었다. 이 금주령은 28년 간 계속돼 4대왕인 세종 2년까지 이어졌다.

18세기 유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은 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주금론(酒禁論)’을 주장했다. 주금론을 편 이익이 술을 싫어하는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 젊었을 때는 술을 좋아했는데 후에 술을 끊었다고 한다. 그는 자식에게 남긴 유언에 “내 제사에는 다른 음식은 쓰되 술은 절대로 올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약주(藥酒)라는 말이 금주령 시대에 몰래 마시기 위한 하나의 도피용으로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삼배주계(三杯酒戒)의 주령

 

독주를 즐겼던 조선왕실의 관료들은 수시로 금주령을 당해야 했다. 조선 효종 3년(1652년)에는 ‘근래 젊은 관원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한다. 마시지 않는 자는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니 임금이 직접 여러 관서의 벽에 금주의 방문을 써 붙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영조 4년(1728년)에는 형조판서가 ‘판매업자가 날로 번성해 어떤 자는 하루에 100여 석의 술을 판다. 이로 인해 살상사건이 빈발하니 엄하게 다스리겠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결국 영조는 1733년 1월에 금주령을 내렸다. 물론 밀주제조 단속도 엄격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조상 제사에도 술을 올리지 못하고 냉수를 떠놓았다. 폭음이 폭행, 강간, 당쟁을 유발한다고 믿었던 영조는 1757년에 ‘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이라는 금주 관련 책까지 직접 펴냈다.

순조 14년(1814년)에는 금주령의 실행이 어려우니 화주만 금하자고 상소한 형조판서가 파면됐고, 순조 32년(1832년)에는 전(前) 군수가 집에서 술 빚다가 멀리 귀양을 가게 됐다. 순조 15년(1815년)에는 권력자는 면하고 백성들만 걸려서 재산을 빼앗기곤 해 원성이 높았다. 더욱이 ‘임하필기’(林下筆記∙1880년)에는 관리의 승급에 술 마시는 자는 차례를 뒤로 돌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금주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충(忠)과 함께 효(孝)를 으뜸에 드는 덕목으로 여겼던 조선사회에서 ‘술은 하늘이 사람들에게 마시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제사 때 사용하라고 만들었다’는 ‘상서(尙書)’ 대목을 중요한 실천 항목으로 여겼다. 당연히 제사 때 술이 빠지면 안 됐고, 이로 인해 금주령 실천은 쉽지 않았다. 사실 제사에서 가장 핵심에 드는 음식은 메(밥)와 술이다. 메는 조상 한 분을 상징한다. 그래서 두 분을 모시면 메가 두 그릇이 마련된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차려도 메가 빠지면 제사가 진행될 수 없다. 또한 제주도 마찬가지였다. 술은 조상이 오셔서 한 잔, 식사를 하신다고 한 잔, 가신다고 한 잔 등 제사의 전체 의례를 진행하는 사회자 구실을 한다. 제사에서 얼마나 술이 중요했으면 차(茶)를 올리는 차례에 술이 그 자리를 대신했겠는가. 그러나 죽은 뒤에 마시는 석 잔의 술보다 살아서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더 좋은 것은 당연하다. ‘죽어 석 잔 술이 살아 한 잔 술만 못하다’는 속담은 이런 심정을 오롯이 담고 있다. 여기서 ‘죽어 석 잔’의 술은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으로 이어지는 삼작(三酌)의 예법을 가리킨다. 그만큼 성리학적 예법이 민간에까지 철저하게 관통된 결과로 이 속담이 나왔다. 술 마심에 있어서 죽어서도 홀수배는 여일하다.

하지만 지극히 예를 갖춘 이 석 잔의 술도 이미 죽은 몸이 받는 것이라 별반 소용이 없다. 곧 ‘부모 살아생전에 잘 해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를 융숭하게 잘 모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이 속담은 경고한다. 이와 비슷한 뜻을 지닌 다른 속담으로는 ‘죽은 석숭(石崇)보다 산 돼지가 낫다’가 있다. 우리의 제사에서 술은 조상 신령과 살아있는 후손을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비록 중국의 〈주자가례〉를 통해 조상 제사를 모셨지만 우리 선조들은 일이 잘 돼도 조상 덕, 잘 못 돼도 조상 탓으로 여겨 술은 먼저 조상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금주(禁酒)는 관청이 명을 내려서 술을 빚고, 팔고, 마시는 것을 금지했다. 금주의 주요 목적은 식량의 소모를 감소시켜 백성의 먹을거리를 절약하고 전쟁과 흉작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는 역대 금주의 주요 목적이었다. 술에 빠져서 풍속을 더럽히고 화를 부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다는 것은 통치자 본인에 대한 것이었다.

금주도 여러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절대금주, 즉 관청이나 사가에서 모두 금하는 것, 온 사회에서 모든 술의 생산과 유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룩 금지로서 이는 일종의 특수한 방식이다. 즉 누룩은 관청에서만 판매하고 사가에서 제조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것인데, 누룩이 없으면 주조는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부분 지역 금주인데, 이는 원나라 때 비교적 보편화 됐었다. 그 주요 원인은 지역마다 식량의 수확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사료에서 또 한 가지의 금주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사실상 사가는 금하고 관청은 금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가 주조를 완전히 공제하고 사가에서의 주조와 술 판매는 모두 금지 대상이다. 금주할 때 권주 세주는 모두 거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상에도 ‘우금우징’의 정책을 실시한 적이 있다. 즉 진나라 때 상앙이 실시한 술에 대한 증세 고가(高價)정책이 그것이다. 고가가 술의 소비량을 제한하고, 따라서 술의 생산량도 제한하는 것이다.

“술이 극에 달하면 어지러워지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픈 일이 생긴다.”(酒極則亂 樂極則 悲 萬事盡然)

 

◇세종의 계주교서(戒酒敎書)

 

조선시대 왕들은 술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 종종 금주령을 내렸는데 그 주요한 것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왕조실록에서 금주령을 ‘계주교서’로 엄하게 백성들에게 내리고 있다.

세종 15/03/23(병자)에 이르기를 ‘주고를 짓도록 명하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이조판서 허조(許組, 1369년~1439년)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술로써 몸을 망치는 자가 진실로 많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사람으로 말하자면 봉녕군(奉寧君) 및 신장(申檣), 김고(金顧) 등이 술을 즐기고 밥을 적게 먹어서 그 몸을 잃었습니다. 신이 벼슬에 오른 처음에는 소주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으니 그 호화롭고 사치함이 극하여 소주로써 목숨을 잃은 자가 흔히 있으니, 신은 심히 염려하옵니다. 또 듣건대 원세조(元世祖)가 금주법을 세우고 술을 옥항아리에 넣으니 술이 모두 새고 옥항아리가 두 갈래 창(鈒)과 같아졌으므로, 그 독을 대궐 밑에 두고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서 경계하였으니, 그 술의 독기가 심하여 경계해 보임이 지극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술을 과하게 먹지 못하게 하는 영을 내리면 거의 목숨을 잃는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굳게 금할지라도 그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했다.

조가 아뢰기를, “금사안자(金絲鞍子)를 사람마다 하였었으나 금령(禁令)이 내린 뒤로부터 법을 범한 안장이 아주 끊어졌으니, 대저 법을 위에서 세우면 행하기 쉽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게 받아들이고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허 판서의 말이 진실로 아름다우나, 그것을 금하기는 진실로 어렵다. 그러나 주고(酒誥)를 지어서 여러 신하들을 경계함이 가하다. 집현전 제술관(製述官)을 데리고 오너라, 내가 장차 반포해 내려서 신하들을 경계하겠다” 했다.

이조판서 허조의 주청으로 세종은 15/10/28(정축)에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려 반포하게 하였다.

영조시대에는 금주령이 내려진 후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어제계주윤음》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금주의 당위성을 홍보하기도 했다. 순조 때는 금주령을 실행하기 어려우니 화주(火酒)에만 국한하자는 상소를 올렸다가 형조판서가 파면되기도 했다.

이렇듯 법과 술의 힘겨루기는 번번이 술의 판정승으로 귀결됐다. 그 내용은 알코올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정신을 온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즉, 알코올의 폐해와 그 용도를 정확하게 알리는 내용이다. 세종의 ‘계주교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체로 들으니, 옛적에 술(酒)을 마련하는 것은 술 마시는 것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신명(神明)을 받들고 빈객(賓客)을 대접하며, 나이 많은 이를 부양(扶養)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제사 때에 술 마시는 것은 술잔을 올리고 술잔을 돌려주고 하는 것으로 절차를 삼고, 회사(會射) 때에 술 마시는 것은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향음(鄕飮)의 예는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양로(養老)의 예는 연령과 덕행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건만 오히려 말하기를, 손과 주인이 백 번 절하고 술 세 순배를 돌린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종일 술을 마셔도 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선왕이 술의 예절을 제정할 때에 술의 폐해에 대비한 것이 더할 수 없이 극진하였다. 후세에 내려와서 풍속과 습관이 옛스럽지 않고, 다만 크게 많이 차리는 것만을 힘쓰게 된 까닭에 금주하는 법이 비록 엄중하나 마침내 그 폐해를 구제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술의 해독은 크니 어찌 특히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위의(威儀)를 잃게 한다. 혹은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니,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만들며, 해독이 적으면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상실하게 한다. 그것이 강상(綱常)을 더럽혀 문란하게 만들고 풍속을 퇴폐하게 하는 것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우선 그 중에서 한두 가지 경계해야 할 것과 본받아야 할 것만을 지직하여 말하겠다. 상(商)나라의 주왕(紂王)과 주(周)나라의 여왕은 술로 그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며, 동진(東晋)의 풍속은 술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정(鄭)나라의 대부 백유(伯有)는 땅굴을 파서 집을 만들고 그 속에서 밤에 술을 마시다가 자석(子晳)에게 불태워져 죽었으며,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은 매양 손님들과 크게 마시기를 좋아하여, 손이 오면 문득 손이 떠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타고 온 수레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더니, 흉노에게 사자로 갔다가 술에 취하여 살해되었다. 후한(後漢)의 사예교위(司隸校尉) 정충은 자주 제장들에게 찾아다니면서 술을 먹더니 창자가 썩어서 죽었으며, 진(晉)나라의 상서 우복야(尙書 右僕射)주의는 술 한 섬을 거뜬히 마시었는데 한 번은 옛 친구가 왔으므로 함께 즐겨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가, 술이 깨서 손(客)을 가보게 하였더니 손은 이미 갈비가 썩어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후위(後魏)의 하후사(夏候史)는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하며 좋은 막걸리를 입에서 떼지 않으니,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마침내 술에 취한 채 혼수상태로 죽었다. 이러한 일들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일들이다.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주고(酒誥)를 지어 상(商)나라의 백성들을 훈계하였고, 위(衛)나라의 무공(武公)은 빈연(賓延)의 시를 지어 스스로 경책(警責)하였다. 진(晉)나라 원제(元帝)가 술 때문에 정사를 폐하는 일이 많으니, 왕도(王導)가 깊이 경계하여 말하니, 임금이 술잔을 엎어버리라고 명령하고 드디어 술을 끊었다. 원(元)나라의 태종(太宗)이 날마다 대신들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더니, 야율초재(耶律礎材)가 드디어 주조(酒糟)의 금속 주둥이를 가지고 가서 아뢰기를, 이 쇠(鐵)도 술에 침식(侵蝕)됨이 이와 같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의 내장이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매, 황제가 깨닫고 좌우의 모시는 사람들에게 칙명을 내려 날마다 술은 석잔 만 올리게 하여 끊었다. 진(晉)나라의 도간(陶侃)이 매번 술 마실 때에 일정한 한계가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조금만 더 먹으라고 권하니, 도간이 한참 동안 슬픈 얼굴을 하다가 말하기를, ‘소년 때에 술 때문에 실수한 일이 있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그 약속한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유곤(庾袞)은 그의 아버지가 살았을 때에 항상 곤에게 술을 조심하라고 훈계하였다.”

 

술이 발견됐을 당시부터 이 주계가 발표될 당시까지의 술의 악덕만 나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금령을 내린다는 엄명이다. 물론 신하들이 제수용, 간강용 등은 금주령으로 다스려질 성질이 아니라고 간하기도 했다. 특히, 향음 이외에는 술을 사용할 수 없다는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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