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禁酒法’은 역사상 가장 실패한 법 가운데 하나

‘禁酒法’은 역사상 가장 실패한 법 가운데 하나

 

 

 

금주법의 虛와 實:미국엔 아직 금주법 잔재 남아

 

 

◇조선시대 금주령 자주 한 까닭은


“잘 들어, 앞으로 조선에서는 술을 못 마신다. 알았지? 사람이 굶어죽는 마당에 술을 담근다는 게 말이 돼? 고통 분담은 IMF 때만 하는 게 아냐. 시도 때도 없이 해야 하는 게 고통 분담이야! 앞으로 내가 왕으로 있는 동안 술 마시다 걸리면 그 길로 끝이야. 알았지?”

“저기, 전하. 원래 전임 왕들께서도 식량 사정이 좋아지면 금주법을 풀고 그랬거든요? 사람이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묘한 습성이 있는지라….”

“입 다물고 다들 잘 들어. 술이란 거, 이거 백해무익하거든. 술 끊어봐라. 그게 바로 웰빙의 시작이다. 다 너희 건강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잘 새겨듣고, 어쨌든 술 마시지 마. 이상 끝!”

〈엽기 조선왕조실록〉(이성주 지음, 추수밭 펴냄, 2007년)의 ‘주막에도 술이 말라버린 영조 치세 반백 년’ 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글은 이어진다.

 

새로 왕위에 오른 임금은 즉위하자마자 금주령을 내렸다. 원래 조선시대 왕들은 툭하면 금주령을 내리곤 했다. 흉년이 들어 먹고 죽을 쌀도 없는 마당에 술을 빚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풍년이 들면 해제하곤 했는데, 이번 왕은 좀 달랐다. 말 그대로 ‘술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아무래도 정권 초기에 분위기 쇄신용으로 하는 거겠죠?”

“뭐 그렇겠죠? 원래 정권 잡으면 범죄와의 전쟁도 하고 개혁도 하며 한참 분위기 띄우면서 시작하는 거니까 좀 지나면 다시 잠잠해질 겁니다. 한 1,2년 버티면 다시 원상 복귀하겠죠.”

하지만 신하들의 생각과 달이 이 임금은 ‘술과의 전쟁’을 1,2년짜리 전시행정용이 아니라 국정 과제이자 정권을 건 숙원사업으로 벌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당황했다.

“술 없이 어찌 산다고 이러시나.”

“이거 참 문제예요, 문제. 백성들이 지금 난리가 났어요. 술 마시다 걸리면 목이 떨어질 판이니.”

“좀 기다려봅시다. 전하께서 천년만년 사시는 것도 아니고, 좀 지나면…후후후.”

신하들의 생각을 비웃기나 하듯 이 임금은 오래오래 살았으니,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오랫동안 임금 노릇을 한 영조대왕이 바로 이 강력한 금주령의 주인공이었다. 영조는 무려 5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조선에서 술을 없애겠다고 두 팔을 걷어붙이게 된다. 이런 강력한 의지를 대외에 천명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특수 수사대의 창설이었다.

“금주령의 확고한 실행을 위해 형조와 한성부의 수사대원들을 뽑아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한다. 이 금주 단속 특별수사대의 이름은 ‘금란방(禁亂房)’이라 하고, 이들을 통해 건전 문화 창달과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며…, 어쨌든 술 마시는 놈들은 다 잡아들인다!”

영조시대의 금주령은 해가 갈수록 정도가 더 심해져갔다. 그러나 이게 어디 지도자의 의지 하나만으로 끝날 문제겠는가? 더구나 영조가 그렇게 믿은 금란방 단속반원들은 ‘언터처블’의 케빈 코스트너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아니, 주모! 내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벌건 대낮에, 그것도 한성바닥에서 술을 판단 말이오! 나라의 국법이 지엄하거늘. 안 되겠어. 여봐라, 당장 이 여인을….”

<생략>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이깟 엽전 몇 푼에 넘어가는 그런 관원이 아니라니까!”

“얼마면 돼? 그까짓 거 얼마면 넘어올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믿은 금란방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영조는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은 이 틈을 비집고 금란방의 개혁을 주장했다. 영조도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하자, 그에 힘입은 신하들은 금주령의 완화를 계속해서 주장하게 된다. 수세에 몰린 영조는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 자식들, 딱 한 녀석만 걸려봐. 아주 요절을 내줄 테니까.”

이런 시점에 걸리면 말 그대로 ‘시범케이스’가 되는 것이다. 영조의 마음을 아는 모든 신하가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 명이 걸려들었다.

“전하! 남병사(南兵使․남도병마절도사, 종2품 무관직) 윤구연이 집에서 몰래 술을 빚어 술판을 벌인다 하옵니다. 전하의 지엄하신 영이 내린지가 언제인데, 장수된 자가 이리 방자하게 술판을 벌이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공무원들의 기강 확립을 위해 윤구연을 파직시키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보고를 들은 영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자식, 딱 걸렸어! 내가 그렇게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장군씩이나 되는 놈이 술판을 벌여? 너 오늘 죽어봐라. 어이, 당장 달려가서 윤구연을 잡아들여라!”

영조는 그 길로 선전관을 보내 윤구연을 잡아들였다. 이때 선전관이 증거로 들고 온 것이 술항아리였다. 문제는 그 술항아리에 있던 술이 금주령 이전에 빚은 술이라는 것이다. 즉, 윤구연은 금주령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걸려들기만 기다리고 있던 영조에게 이런 ‘사소한’ 일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 자식, 너 내가 뭐랬어. 술 마시지 말랬지? 국가 시책으로 술 마시지 말라면 공무원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거 아냐. 어쭈, 이놈이 지금 임금 앞에서 눈을 부라려?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구만. 안 되겠어. 이놈을 당장 사형시켜!”

영조는 작심하고 윤구연을 시범케이스로 삼으려 한 것이다. 윤구연의 사형 언도 소식을 듣자 삼정승이 모두 나서서 구명을 청했다.

“전하, 종2품이면 차관보급입니다. 일국의 차관보를 아무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죽인다면 전하의 이미지상….”

“어쭈, 언제 너희가 내 이미지를 걱정했냐? 이놈들이 아예 한꺼번에 덤비네? 오늘부로 모두 해고야. 나갈 때 호조에 들러 퇴직금 정산하고, 책상 오늘 내로 다 빼!”

삼정승이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다 파직되자, 이번에는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홍문관 삼사가 합심해서 영조에게 재심을 요청했다.

“이놈들이 이젠 아예 작당을 해서 덤벼드네. 너희가 배가 불렀구나. 너희도 다 옷 벗어. 어이, 도승지. 이놈들 퇴직금 정산해주고 얼른 대궐에서 나가라고 해!”

그 뒤로도 윤구연에 대한 재심을 요청하는 신하들이 벌떼같이 덤벼들었지만, 영조는 모두 무시하고 윤구연을 참형에 처했다. 게다가 영조는 남대문 앞으로 나가 망나니처럼 칼을 뽑아들고는 직접 윤구연의 사형을 집행했다.

차관보의 목을 직접 칠 정도로 강력하게 금주령을 시행한 영조. 그러면 영조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을까? 이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조선왕조실록》 영조 12년 4월 24일의 기록이다. 영조의 석강이 끝난 뒤, 조명겸이 영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전하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신이 그 거짓과 참을 알지 못하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하도록 하소서.”

조명겸이 은근히 영조에게 우리는 못 마시게 하고 혼자만 술을 마시는 게 아니냐고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이 말에 대한 영조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내가 목이 마를 때에 이따금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소주로 의심했나 보다.”

영조는 그렇게 술인지 오미자차인지 모를 음료로 목을 축이며 금주령을 강하게 시행했다.

하지만 50여년 동안 벌어진 술과의 전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이 술을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맛을 봐버린 후에 금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오죽하면 금주령을 말하는 왕 자신조차 술인지 오미자차인지 헛갈리는 정체불명의 ‘음료’를 마셨을까.

 

*금주령의 ‘허(虛)와 실(實)’에 대해 〈엽기 조선왕조실록〉만큼 쉽고 재미있게 표현한 글도 없을 듯싶어 많은 부분을 인용했다.

 

◇우리나라는 주당들의 천국

우리는 전국 어디를 가나 술만큼은 쉽게 구입이 가능하고, 마실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우리처럼 술을 쉽게 살 수 없고 마실 수 없다. 주당들에게 있어 우리나라는 천국인 셈이다.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시대에 금주령(禁酒令)을 자주 내렸던 까닭은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조선에서는 쌀로 술을 빚었기 때문에 쌀 소비를 줄여 식량 사정이 악화되지 않도록 금주령을 내렸다. 특히, 가뭄이 들어 흉년이었을 때에는 더욱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했다. 천재지변이나 재난 또는 국상(國喪)이 있으면 전 국민이 근신하자는 의미에서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다만, 늙고 병들어서 술을 약으로 먹는 따위나 가난한 나머지 술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경우, 또 부모 형제에게 대접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은 예외로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술맛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금주령 때문에 술을 끊거나 씨를 말릴 정도로 술을 빚지 못했던 것은 아닌 듯싶다. 앞에서 영조시대의 금주법에 대해 알아봤지만, 아무리 단속이 심해도 마실 사람은 마시지 않는가. 그런 게 인간의 습성이기도 하다.

 

◇미국 금주령 해제에 국제적 관심

1933년 12월 5일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米國禁酒法 五日부터 撤廢(*당시는 미국을 일본식으로 米國이라 씀)

外國酒類輸入許可令에

루大統領署名

 

[電通 윔스프랑스 2日發] 루스벨트 대통령은 본일 금주법 철폐로 외국주류수입허가령에 서명하였다. 동령은 1910년부터 1914년까지의 수입량을 기초로 산정된 것으로 동령 실시 후에는 약 400만내지 5백만 깰론의 주류수입을 허가하야 일본에 대하여서는 맥주에 대하야 18만8천 깰론을 허가하고 기타의 양조음료에 대하여서는 무제한으로 하엿다.

(*당시 신문에 실린 원본으로 현대식 교정 생략)

 

미국의 금주법 해제가 전 세계에 타전될 만큼 관심사가 된 것은 미국의 금주법 제정 과정이나 이후 나타난 여러 문제점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이 금주법을 제정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곡식을 절약하자는데 있지만, 속사정은 독일의 양조업자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여러 정황으로 알 수 있다.

1914년 미국의 정기항로선(船) 루시타니아(Lusitania)호(號)가 독일 U-보트의 야만적인 공격에 침몰 당하자, 그동안 중립적 입장을 취했던 미국은 1917년 4월 6일 참전하게 된다. 참전 나흘 후인 4월 10일 ‘식량통제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고, 이때부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식량을 통제하게 된다. 우선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의 제조가 중단됐고, 맥주를 만들던 양조가와 포도주 사업자에게는 엄격한 제제가 따랐다.

전범 독일인에 대한 증오심은 엉뚱하게 금주 운동가를 자극해 금주운동은 더욱 격렬하게 번졌고, 맥주산업을 손에 넣고 흔드는 독일인에 대한 반감 등이 얽혀 금주운동을 전국화 하자는 요구가 드세졌다.

윌슨 대통령의 비토에도 불구하고 발안자인 볼스태드(Volstead)의 18차 수정안이 의회를 통과한 것이 1919년의 일이었다. 1월 16일 ‘주류판매 및 양조금지’를 주내용으로 하는 금주법(Prohibition) 18차 수정안이 비준됐고, 1년 후인 1920년 1월 19일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1920년 1월 20일 효력을 발휘한 금주법은 결과적으로 보기 드문 ‘악법(惡法)’이었다. 이 법의 주요 골자는 0.5% 이상의 알코올이 포함된 음료가 미국 영토 내에서 만들어지거나 판매․운반․수출입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금주법 시행 초기에는 술을 든 채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벌금 1000달러에 6개월 금고형이 처해질 만큼 강력했다. 이 법률 때문에 술을 밀수․밀송․밀매하는 갱(gang)조직이 날뛰게 됐으며, 문자 그대로 ‘광란의 1920년대’였다. 금주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도시에는 무허가 술집이 많이 생겼다. 영화 ‘대부(代父)’의 사회적 배경도 이 시대였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알 카포네(Al Capone․1899~1947)의 갱단이 생겨났고, 뉴욕의 술집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금주법이 시행되고 나서 1만5000개 정도였던 술집은 3만2000개로 2배 이상 증가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당시 미국 대학생들은 알 카포네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 견줄 만큼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세계 10대인’으로 선정할 정도였으니 알 카포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칵테일이 생긴 것도 이때의 일이다.

미국의 금주법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고된 법이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관점이다. 음주는 법으로 금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고, 국민들도 따르지 않았다. 금주법 시행 이후 밀주(密酒)가 성행하면서 오히려 건강 악화와 범죄가 늘어났다. 주류 밀거래는 마피아와 같은 갱단의 급성장을 가져와 미국의 범죄역사를 바꿔놓았다.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은밀한 일을 뜻하는 ‘문라이트(moonlight)’라는 단어는 당시 달빛 아래서 술을 몰래 제조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금주법은 뉴딜정책의 선물로 양조업자들의 불만이 고조됐고, 1929년 경제공항이 몰아치자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이 폐지에 앞장섰다. 대공황의 혼돈 속에서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민들의 지지 속에 수정헌법 22조를 만들어 금주법을 폐지한 것이다.

미국 대부분의 주(州)에서는 만21세 미만의 청소년은 술을 마실 수 없다. 1920년대 시행됐던 금주법이 청소년들에겐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미국 청소년들은 21세가 되는 생일이면 이를 기념해 친구들과 어울려 ‘바 호핑’을 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이 21세 된 아이를 데리고 술집을 찾아가서 축하해주고, 술집 주인은 21세를 축하하는 술을 한 잔 내기도 한다.

오하이오주에서는 21세 미만 청소년에게 술을 판 종업원은 1000달러 정도의 벌금을 내야하고, 해당 술집은 벌금과 함께 곧바로 영업이 취소된다. 주류판매면허는 취득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주류판매면허를 취득하려는 사람은 체납된 세금이 하나도 없어야 하고, 감옥에 갔다 온 전과가 있어서도 안 된다.

인간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진다. 술도 매한가지다. 마시지 말라고 하면 더 마시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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