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추구하며 술을 마시는 시인, 도연명

자유를 추구하며 술을 마시는 시인, 도연명

 

 

박정근(문학박사, 대진대 교수 역임, 작가, 시인)

 

박정근 교수

왜 술을 마시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아마 각양각색의 관점이 돌출되리라고 본다. 요즘 사람들은 코로나를 비롯해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아 당황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이 나타나 세상의 시스템과 인간관계를 완전히 전복시키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그동안 코로나에 감염되어 강제로 병원 일인 실에 입원하거나 자가격리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신체의 자유를 잃는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를 ‘울며 겨자 먹기’로 당하며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홀로 되씹어야 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희랍시대의 오이디푸스나 구약시대의 욥과 같은 처지인 것 같다.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나 성경 구약의 욥은 신이 내린 운명이나 하나님과 사탄이 벌인 내기의 희생물로 이유 없이 자유의지를 빼앗기는 인물들이다. 그야말로 영문도 모른 채 운명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굴러가는 신세라고나 할까. 도연명이 살았던 시대도 이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내란으로 인해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른 채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에 묻혀 자연에 의지해서 살아갔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운명이나 환경의 거미줄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최근 한 달 동안 내내 뉴스 스크린을 채우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어떤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전략으로 인해서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은 죽음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무기를 들고 있지 않는 시민들에게 미사일과 포탄을 쏘는 러시아의 푸틴은 무고한 욥을 괴롭히는 사탄과 같지 않은가. 인간이 처하고 있는 운명의 속박은 온 시대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도연명은 그를 속박하는 운명적인 속박에서 자유를 찾고자 했다. 물리적 속박을 신체적 저항으로 해결한다면 외적 갈등과 투쟁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시인으로서 도연명이 동원하기에 쉽지 않은 해결책이다. 그는 외적 투쟁을 통한 자유의 획득보다는 좋아하는 술을 마심으로써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술을 얼큰하게 마시면 시인 자신과 외적 환경을 경계선을 잊어버리게 된다. 자유를 추구하는 시인은 정치세력이나 적들과 격론을 벌일 필요가 없다. 단지 자신의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시면 된다. 술에 취해가는 시인은 자신의 상상력과 감정에 몰입하면서 자유롭게 구축한 환상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시인 도연명은 세상의 속박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를 초월하고 자유를 획득하는 장면을 <그치지 않는 비에 혼술을 하며 連雨獨飮>에서 재현하고 있다.

 

故老贈余酒, 오랜 지기인 노인이 술을 보내면서

乃言飮得仙. 그 술을 마시면 신선이 되리라 하네.

試酌百情遠, 첫 잔 마시자 모든 감정이 멀어져가고

重觴忽忘天. 두 잔을 마시니 하늘도 갑자기 잊혀지네.

天豈去此哉, 하늘이 어떻게 이곳을 떠나갈까 마는

任眞無所先. 자연에 맡겨두니 어느 것도 앞설 것이 없어라.

 

혹자는 도연명이 이 시에서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도연명 시인이 알코올 중독자일지 모른다고 의혹을 제기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도연명이 택한 방법은 문명화된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신을 이런저런 구속의 잣대로 자신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도연명은 현실로부터의 회피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속의 포승줄로 묶여있는 인간을 한탄하고 나선다. 각자의 의식의 범주를 벗어나 타인과 술을 나누며 공감대를 넓혀갈 수 있는 개방성의 부재를 나무란다. 그는 <음주(飮酒)>라는 시에서 세상의 속물성을 나무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道喪向千載, 도를 잃어버린 지 천년이 되어 가는데

人人惜其情.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만을 집착하네.

有酒不肯飮, 술이 있어도 즐겨 마시려 하지 않고

但顧世間名. 오직 세상의 명성만을 쫒는구나.

 

이 시는 단지 세태를 비판하는 것만을 의도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행위를 통한 속물적 명성의 추구는 시인이 추구하는 자유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고 본다. 사실 명성이란 그것이 규정하는 범주에 인간을 구속하는 결과를 낳는다.

시인은 그의 정신이 추구하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속세적 규제나 범주를 넘어설 수 있는 무의식적 일탈을 원한다. 술은 답답한 현실로 부터 시인의 일탈을 돕는 보조기제로서 술을 택한다. 술은 시인에게 일탈의 탈출구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도덕률은 술을 마시는 것을 자제하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술병에 지나친 음주는 건강을 해친다고 경고하는 문구를 적어 넣는다. 사실 술에 대한 절제를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지 술을 마시기 위해 음주행위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술이 가져다주는 자유추구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음주가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도록 자제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지나친 술에 의한 도취는 자신과 사회를 망가뜨리는 부정적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도연명이 시에서 제시하는 메시지는 술의 위험성 못지않게 인간적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도량을 가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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