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마다 행하는 술 절제에 대한 다짐

새해 벽두마다 행하는 술 절제에 대한 다짐

 

박 정근(문학박사, 대진대교수 역임, 작가, 시인, 황야문학 주간)

 

 

박정근 교수

나이가 칠순을 넘기면서 술에 빨리 취하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남들이 斗酒不辭形이라고 칭하는 필자가 타이틀에 걸맞는 신체적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 애주가는 술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음주 후에도 술에 의해서 흐트러지거나 무너지면 호칭을 받을만한 자격을 상실한다. 필자에게 애주가들로 뭉친 선후배들 모임이 있는데 음주 부작용으로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모두 유사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하철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가는 필자를 위시해서 지하철을 반대방향으로 타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거나, 만취한 상태로 넘어지기도 하고, 몸을 가누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생긴다.

 

이런 불안한 현상은 가족들의 걱정을 수반한다. 게다가 겨울철이면 근심걱정이 배가한다. 사실 필자도 새벽까지 포장마차를 전전하다가 새벽 테니스를 하러 갔던 과거의 영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체력으로 술을 마시는 두주불사형의 약효가 이제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술을 이겨내던 과거에는 그런대로 이해하던 아내의 반응이 달라졌다. 요즘 그녀는 필자의 약화된 모습에 걱정이 된 나머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술을 절제하도록 요구했다. 심지어 잔소리를 끈질기게 해도 연속되는 술자리를 보고 술을 절제하라는 서약서를 쓰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은 죄가 있으니 아내의 요구를 강력하게 거절할 수 없다. 마지못해 새해에는 일주일에 한번만 마시겠다고 서약했다. 하지만 그 서약이 오죽이나 잘 지켜지겠는가. 술 앞에만 서면 간이 커지는지 작아지는지 모르겠지만 술과 친한 사이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수십 년 간 술잔을 빠르게 마시던 버릇을 어디 남에게 주겠는가. 집에 가서 잔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호기 넘치게 술잔을 털고야 만다. 문제는 술자리에서 일어난 이후에 발생한다. 귀가를 위한 전철에서 잠을 이겨내려고 애쓰지만 나도 모르게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다.

난점은 술자리의 파문이 필자나 애주가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견디다 못한 애주가들의 아내들이 데모를 하기 시작한다. 애주가들의 아내들은 참석자의 부인들에게 서로 전화를 걸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절제시키도록 요청한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술자리의 책임이 어디에 있든 술자리 참여자들에게 짜증을 내게 된다. 이 정도면 술을 마신 본래의 정신은 어디가고 마치 숙취의 부정적인 후유증만이 남아 인간관계에 상처를 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런 술꾼들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은 없는 것인가.

 

사실 인생이 칠십이 넘고 팔십이 가까우면 특별하게 즐거울 것이 별로 없다. 인생에 대한 환상이 모두 사라지고 각박한 현실만이 각인되는 나이이다. 자식들을 양육하고 교육시키느라고 등뼈가 휘도록 일을 했지만 경제적으로 별로 충분하지 못한 노인들이 많다. 즐거움을 찾아 배회하는 노인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술이 아닐 수 없다. 종로3가는 돈 일이만원으로 노인들의 쓸쓸함을 달랠 수 있는 실비집들이 즐비하다. 노인들은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그럴듯한 안주를 놓고 술을 마실 수 없다. 설혹 사정이 좋은 노인들도 며느리의 눈치를 보느라 집에서 요리를 만들어 즐길 수도 없다. 또는 독거노인이라면 말짱한 정신으로 쓸쓸한 방으로 돌아가는 것도 끔찍하다.

 

이런 우울한 상념을 늘어놓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술은 각박한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디오니소스의 선물이 아니던가. 인간은 모든 모임에서 삶의 윤활유로서 술을 이용하여 축하고 서로의 유대를 촉촉하게 만들고 있다. 다만 우리는 주신제의 현장에서 자주 발생했던 몰아지경의 극단적인 행태가 현대사회의 현실과 부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종종 발생하는 폭력사건의 배후에는 밤의 향락을 즐기기 위해 절제의 미학을 내던져 버리는 비합리적인 인간들이 노출된다. 필자를 포함한 애주가들이 폭음으로 인해 겪고 있는 후유증은 주신제의 폭력성과 동일한 현상이라고 진단해볼 수 있다.

 

술이 아무리 축제적 효과가 긍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마시면 독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은 그야말로 ‘술을 권하는 사회’라는 악명을 지니고 있다. 술을 통해 사랑과 우정을 전한다는 긍정성은 지나치지 않게 절제한다는 전제에서 수용되어야 한다.

이미 대학 신입생들을 위한 엠티 행사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지나치게 술을 마시게 하다가 죽음으로 내몬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다. 선배들은 지나친 음주가 독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후배에 대해 일종의 화학적 페널티를 가했다고 볼 수 있다. 후배들에게 축제적 분위기를 조성해주어 그들에게 학문적 공동체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는 기쁨을 공유하게 하는 휴머니티를 느끼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필자는 애주가 모임을 사랑하기에 모임의 축제성이 지속되는 전략을 숙고하고 있다. 술은 인간의 축제를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지나친 음주로 인해 인간이 술의 도구화로 전락하는 어리석음을 방지해야 비로소 술을 마실 자격이 있다는 원칙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애주가들이여, 자신이 술의 도구화로 전락하는 시점을 파악하는 아폴로적 이성을 유지하라. 그 순간 여러분들은 진정한 애주가로서 자격요건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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