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아 솔아’ 시인 박영근의 기행적 술 이야기

솔아 솔아시인 박영근의 기행적 술 이야기

 

 

박정근 (문학박사, 황야문학 주간, 소설가, 드라마작가, 시인)

 

 

박정근 교수

시인과 술은 가까운 상관물로 알려져 있다. 시라는 장르가 현실적인 사고보다는 낭만적 사고나 일탈적 사고로 만들어지는 경향에서 나온 말일 수 있겠다. 또한 시인 중에 술을 좋아하는 기인들이 많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어느 시인의 삶이 술로 인해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면 더더욱 시인과 술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논의될 수밖에 없다.

최초의 노동시인으로 알려진 박영근은 술에 관해 수많은 기행적 이야기를 남겼다. 박영근은 신동엽 창작기금과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고 한국작가회의의 시분과 위원장으로 뛰어난 시집을 일곱 권이나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솔아솔아 푸른 솔아〉의 원작자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시인이다.

 

박영근의 술버릇은 술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막걸리 시인 천상병과 닮았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행태는 상당히 다르다. 천상병 시인은 하루에 두세 병의 막걸리를 매일 마시면서 항상 술에 취해 살아갔다. 약간 취한 상태에서 천진난만한 뛰어난 시편들이 탄생했다.

대조적으로 박영근은 간헐적인 폭주형의 문인이었다. 시를 쓰는 동안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최고로 명증한 상태에서 시작업을 하려고 애썼다. 2-3 주일 또는 한 달 동안 시작업을 하는 경우 단주를 원칙으로 했다. 창작 기간에 술을 마시자고 찾아온 친구들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돌려보냈다.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술에 대해 최대한의 인내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일단 탈고를 한 후에는 술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며칠이든 술을 지속적으로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박영근의 문제는 사오일 동안 지속적으로 술을 마시는 경우 시간과 공간 지각 능력이 심각하게 줄어든다는 점이다. 화산처럼 일단 불이 붙은 술에 대한 욕구는 좀처럼 중지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인은 지난날 술자리를 하자고 제안했던 동료 시인들이나 친구들이 떠올린다.

그는 수첩에 적힌 명단 중에서 최근에 술을 하자고 약속했던 시인들을 음주의 현장으로 소환한다. 이미 술이 상당히 오른 상태에서 이성적인 분별력은 존재하지 못한다. 그의 가슴속에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더 많은 술을 마시라고 명령하고 있다. 소환 시간은 한밤중일 수도 있고 새벽이 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시만 써서 살 수 있는 시인이 몇 명이나 될까. 정규직이건 아르바이트이건 해가 뜨면 일하러 나가야 하는 시인들이 대부분이다.

 

박영근의 관점에서 시인들에 대한 술자리 소환의 당위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작가회의나 민예총에서 직책을 맡고 뛰어난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언제든 술 한잔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통상적으로 술을 마시자는 제안은 지나가는 인사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술에 취한 시인은 술자리의 초대가 빈말에 불과했다는 불쾌감이 치솟는다.

 

시인은 그 약속을 빌미로 초대자에게 술자리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지금 그 시간이 시인이 술을 마시고 싶은 최고의 순간이니 술자리로 와서 술을 사라는 것이다. 시인들의 입으로 만든 약속이니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불사하고 시인의 절박한 호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시간이 갈수록 술자리에 참석한 친구들은 점점 불안해진다. 밤이 너무 깊어지거나 새벽이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시대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술에 기대고 있는 박영근은 소환자들의 개별적 사정에는 무감각하다. 하지만 사람이 어찌 명분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대의명분에만 집착하면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의 부정의와 불공정을 한탄과 비분강개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의사나 열사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서 술자리를 끝내고 현실의 현장으로 귀환하고 싶다. 하지만 박영근은 그걸 인정하지 않고 대의의 부재에 대해서 한탄의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그는 술에 취하면 시대의 상황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곤 했다. 술친구들은 그저 애꿎은 소주만 목구멍에 털어 넣을 뿐이다.

 

시인과 술친구의 관계가 우정이라는 공동체적 관계에서 낭만과 현실, 이상과 존재라는 대척적 관계로 변질하는 시점이 다가오면 분위기가 겉돌게 된다. 술친구는 자신의 현실적 존재를 위협하는 시인의 저항적이고 비사회적인 태도가 점점 부담스럽다. 사실 젊은 시절 거리에서 반체제적 구호를 함께 외쳤다는 시인적 체험이 어찌 평생 유지되어야 할 영구적 가치가 될 수 있겠는가. 지금은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아내와 자식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 마시는 술값은 가족을 부양해야 할 생활비이고 지나친 술값은 당장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무책임한 지출이라는 회의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꿈쩍하지 않고 술잔을 들고 있다.

 

술친구는 점점 술을 마실 의욕을 잃어간다. 시대적 고통을 절창으로 풀어낸 시인을 만나며 술을 마신다는 인간적 가치는 도대체 언제까지 유효한 것일까. 저렇게 몸을 망가뜨리며 마셔야 시적 영감이 솟아나는 것일까.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는 우리의 삶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가.

시를 쓰겠다고 달려들었던 과거의 다짐은 자꾸만 약해지고 있다. 어쩌면 개인적인 이기심을 벗어나야 대의적 가치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가능하리라. 역시 나는 범인이고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결국은 새벽은 다가오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시인을 택시에 태워서 보내면서 술자리에서 해방이 된다.

 

그는 귀가하면서 어쩐지 입맛이 쓴 표정을 짓는다. 사실 대의적 가치가 공유하기가 쉽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번 술자리는 시작업과 현실적 직업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타협적 삶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가치는 공존하기 어려운 모순적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적 한계를 넘어서서 일탈적 관점을 가져야 시다운 시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 자조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비타협적 음주가 친구에게 시인의 자질에 대해 너무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시인과 함께 새벽을 맞은 술자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보다 두 사람 사이에 거대한 벽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에 시인이 술자리에 호출하면 차라리 전화를 받지 않거나 거절해야겠다는 계산적인 의식에 이른다. 그와의 술자리는 한 번으로 족하며 그 이상의 술자리는 자신의 현실적 세계를 위협하는 요소일 뿐이다. 이런 의식은 혼자만의 생각에 머물지 않으며 가까운 친구들에게 공유된다. 드디어 박영근은 음주로 새벽을 맞는 악명 높은 시인으로 문단에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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