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철 칼럼니스트

 

 

세상이 시끄러워도 봄이다. 정녕 춥고 긴 겨울은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차갑고 메마른 계절이 안으로는 화사하게 피어오를 다음 계절을 품고 있다는 게 매번 놀랍다.

고물가에 환율이 솟구치고, 모든 산업의 급전직하에 서민들의 실상은 여전히 엄동설한이건만, 눈바람속을 헤치고 마음의 열기와 따뜻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은 봄이다.

어쩌면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酸甜苦辣)과 따뜻함, 그리고 황량한 차가움을 피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수천가지 맛과 느낌을 가지고 걸어가는 인생과 같다.

세월은 돌아갈 수 없는 여행이다. 세상의 좋고 나쁨 또한 모두 풍경이다. 넓게 보면 누구의 머리 위에도 푸른 하늘이 있고, 누구에게나 희미해지면 마음속에는 꽃바다가 있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항상 답이 있다. 그래서 고민하기보다는 자연과 시간에 맡기는 것이 좋다. 어떤 일은 웃기만 하면 되고, 어떤 일은 그냥 보기만 하면 되고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큰 나랏일을 제외하고는 너무 고민하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이 많은 게 세상이다.

세상이 어떠하던 꽃 피는 봄이 왔다. 얼기설기 세상은 어지러운데 한가롭게 인터넷을 뒤져보며 봄꽃의 근황을 잠시 살핀다. 이미 지난 1월 중국 쓰촨(四川)성 판즈화(攀枝花)시에 비단솜나무 꽃이 분홍빛으로 가득했고,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 인근에도 핑크 트렘펫나무꽃과 벚꽃이 만개해 장관을 연출했다는 소식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 윈난 다리(云南 大理)의 우량산에 벚꽃이 겨울에 피었고, 구이저우(貴州) 안순시(安順市)인근의 세계에서 가장 큰 벚꽃 기지인 핑바 벚꽃도 2월초 만개했다. 지난해 연말 국내의 남녘 보길도 등지에서도 추위와 어둠 속에서 동백이 붉은 꽃을 피워냈다는 지인의 SNS를 통해 보게 된다.

 

소위 모진 눈비바람과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내고 꿋꿋이 버티면서 인고의 꽃망울을 품은 설중매(雪中梅)를 필두로 ‘자연’이 날갯짓을 시작해 세상 각지에 꽃이 만발하고 있다. 겨울에 보던 앙상한 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꽃을 피울 수 있는 지 신기할 따름이지만, 꽃이 피어나고 있다! 어느 글귀에서 보았듯 시간은 눈과 비를 끓이고, 세월은 꽃을 바느질하며 가는지도 모르겠다. 만물이 물 흐르듯 태어나고, 자라나서 또 사라지듯 말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지나온 길을 되새기고 남은 길을 가늠하게 되지만, 누구나 봄빛 햇살 아래 매화, 벚꽃, 개나리, 목련, 진달래 등의 꽃들이 방긋방긋 형형색색 자태를 뽐내는 풍경에 마음이 설렌다. 故 이성부 시인은 ‘봄’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중략)

 

​그러니까 이 시는 봄이라는 자연의 현상을 통해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한다.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힘이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봄이 찾아온다는 것이며, 시간과 자연의 흐름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란 거다.

또 봄은 희망의 계절로 흔히 기대되지만, 기다림조차 의미를 잃은 상황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따뜻한 봄날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 순환이며 인간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생명과 소생의 무지개가 피는 이 봄에 농부들은 땅을 갈고, 거름을 주고, 씨앗을 뿌리며 한 해 농사를 준비하지만, 필자는 반복되는 한해살이, 이른 바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일상과 주변의 상황에 울적한 요즈음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생각해 보니 인생의 본질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것 같다. 대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위해 고통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할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놀라운 상처는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먼지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혼자 있을 때 비로소 그는 완전한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즉, 혼자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연극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다투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서이다. 멀리하는 것들은 부딪혀야 할 상처에 대한 경멸이다. 그러니까 사람 간의 관계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으면 되는 거다. 원래 나이가 들면 사는 게 혼자가 되는 것처럼 외롭고 재미가 줄어들기 마련인 데다 모든 게 혼자만의 일이 되는 삶이다.

 

결국 인생의 모든 저점을 혼자서 견뎌내고, 스트레스와 굴욕에 놀라지 않으며, 부앙무괴(俯仰無愧)하게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세상을 보고,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루하루 평온을 느끼고, 진실하고 선하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때, 이 봄에 우리는 진정으로 성숙하고 강해질 것이다. 특별히 나라가 어렵고 시절이 하수상 하니 꽃바람 부는 강산이 다시 웅장하고 악귀 없는 아늑한 봄이 되기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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