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재철 칼럼
낭만 그리고 여유
‘‘눈뜨면 아침이고 돌아서면 저녁이고 월요일인가 하면 벌써 주말이고 월초인가 하면 어느새 월말이다. 세월이 빠른 건지 내가 급한 건지 아니면 삶이 짧아 진건지’ 모르겠다” 이런 말을 우린 흔히 듣고 주고받는다.
단군 이래 최악의 불경기에다가 어수선하고, 그야말로 낭만이 사라졌다. 왜 그럴까? 낭만에 젖을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친한 선후배 모임에 가도 모두가 생활에 찌든 표정들이다. 그러다가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누군가 “옛날 우리가 술자리도 많았고 그때가 정말 좋았어”라고 한마디 언급하면 ‘그래 맞아 맞아’라고 다들 화답하는 형국이 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이런 경우조차도 헤아리기 힘들다는 얘기다. 즉 이러한 삶의 낭만적 자리도 맛이 달라졌다고 할까. 우리가 시간을 내서 상상력을 펼치거나 깊은 고뇌를 나누거나 사유를 하면서 행하는 낭만이 깃든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주위에서 우리의 건강을 챙겨주는 의사들도 우리에게서 낭만을 뺏어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싶다. 하루에 술을 석 잔만 마셔라, 나트륨 섭취를 줄여라, 담배는 백해무익하다 등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건강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이들이 권고하는 대로 수칙을 지키며 생활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낭만을 취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인격마저 내려놓고 진탕 취하거나 방탕하게 놀자는 얘기는 더욱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제대로 된 낭만적 여유를 갖기 위한 법을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 낭만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복잡한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서의 역할만 강요할 뿐. 이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아가기 때문에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 그러니 어디에 낭만이 끼어 들 수 있겠는가.
이렇듯 각박한 현실이 아무리 우리를 옭아매더라도, 아니 그럴수록 낭만의 여유가 때로는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무거운 일상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면서 저녁이 있는 낭만적 시간을 각별하게 가져야 한다. 그 순간만은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낭만의 세계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낭만의 세계에는 편견도 없고 규제도 없고 적폐도 없고 이편저편의 경계도 없다고 본다.
가령 누구나 풍광 좋은 산천에서 시를 읊조리며 술 한 잔의 여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 여행의 속성도 이와 비슷하다 하겠다. 많은 사람이 국내외를 여행하는 시대이지만 일상의 낭만도 그래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서로가 술잔을 기울이며 긴장을 풀고 살아가는 그 맛이 낭만 아니겠는가. 여행의 감흥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고 보면 술잔을 넘나들며 나누는 남만은 사람 사는 곳의 여유 아닐까.
계절은 어느새 가을의 끝자락에 섰다. 쌀쌀해진 기온에 온통 차디찬 공기가 가득하지만 단풍, 낙엽, 억새 등 만추의 자연이다. 우리가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것은 그토록 아름답던 가을이 짧게 머물다 가버리기 때문일 터인데, 낭만적인 아름다운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래저래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간다. 한차례 비가 내린 도심의 늦가을 길에서 모두가 ‘낭만적 여유’를 되새기면 어떨까? (칼럼리스트)